[문화산책]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사무처장

광남일보@gwangnam.co.kr
2017년 07월 27일(목) 17:38
안동에 출장을 갔다가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들렀다. 거기 소장된 ‘이응태 묘 출토, 원이 엄마 한글 편지’를 직접 보고 싶어서다.

1998년 4월 경북 안동시 정상동에서 주택 단지를 조성하려고 묘지 1기를 헐었는데 묘장품들이 발견됐다. 묘지 주인공은 고성 이씨 이응태(1556~1586)였고, 미라 형태로 발견됐다. 무인 집안의 키가 훤칠한 선비였고 31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떴다. 아들 원이, 둘째 아이를 잉태한 부인 원이 엄마, 형제자매를 이생에 두고서였다.

원이 엄마의 편지와 함께 미투리가 발견됐는데, 삼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아 삼은 신발 한 켤레였다. 자리보전을 하고 누운 남편이 어서 쾌차해서 새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시라는 애절한 희망을 담아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그 미투리는 허망하게도 남편의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히게 됐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원이 아버님께.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는가요. 늘 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함께 누워서 이보소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남도 우리 같을까? 하며 당신에게 말했는데 어찌 나를 버리고 먼저 갔나요.

당신을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수가 없어 빨리 당신에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가세요. 당신 향한 마음은 이생에서 잊을 수 없으니 이내 마음 어디에다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까요. 내 밴 자식 낳거든 보고 말할 일 있는데 그리 가시니 밴 자식 낳거든 누구를 아빠 하라고 하시는가요. 내 편지 내 꿈에 자세히 보이고 자세히 말해주세요. 그지없어 이만 적습니다.’

가로 58cm에 세로 34cm의 한지에 빼곡하게 써내려간 편지에 적힌 처연하고 지순한 사랑은 430년의 시간을 이기고 환생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감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편지 한 장의 문화유산이 지닌 진솔하고 위대한 힘이다.

원이 엄마 편지처럼 ‘죽어서 다시 만납시다.’는 말을 광주 5월 민중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개정판에서 다시 읽었다. 1980년 5월 27일 4시. 진압군과 시민군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미명이 터오는 전남 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 창가였다. 항쟁지도부 이양현, 윤상원, 정상용 등이 총을 들고 그 자리에 있었다. 이양현이 윤상원에게 말했다.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윤상원이 말했다. “그럽시다. 저승에서 만나면 다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합시다. 민주주의와 통일과 민중을 위해 일합시다. 10일 간의 투쟁 중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나눠 먹고….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 아니었겠습니까?”

아껴주고, 사랑하고, 나눠 먹는 이 단순명료한 사랑의 실천. 이웃들의 생명을 지켜내려던 가슴 뜨거운 공감.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공동체의 신념과 실천. 이런 시민성이 모이고 모여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역사적 사랑으로 승화된 사건. 그것이 5·18이다. 국가적 폭력으로도, 거대 자본과 권력으로도, 아니 그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었던 시민공동체의 연대와 사랑의 기적이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던 중에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가 발표됐다. 에너지 밸리 조성, 미래형 자동차 생산기지 및 부품단지 조성 약속도 참 좋았다. 호남고속철 2단계 사업 조기 완공, 관광복지 확대와 산업 활성화도 바라던 바다. 가장 기쁜 것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2.0 시대 선언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 관련법 제정이다. 특히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되는 것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 전당에 수많은 5·18 광주 시민들의 명예가 수놓아지는 것이다. 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은 광주 정신을 세계 인류의 공동의 문화 자산으로 만들어나가는 국가사업의 지렛대인 것이다.

우리는 5·18 항쟁 열사들과 5·18이 세계정신이 될 수 있도록 죽음을 무릅쓴 모든 시민들에게 헌사를 바칠 수 있게 됐다. 구두닦이, 양복점 점원, 미장공, 이발사, 중고등학생, 주부, 일용노동자, 무직자, 학원 강사들…. 그 수많은 들꽃들에게 새 세상으로 걸어 나가시라고 머리카락 미투리를 신겨드릴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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