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필문 이선제 묘지 20년 만에 귀향한다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사무처장

광남일보@gwangnam.co.kr
2017년 10월 26일(목) 16:29
1998년 5월 고미술 화랑을 운영하는 김 모씨 등은 분청사기로 만든 작은 묘지(죽은 사람의 행적 등을 적어 무덤에 넣는 돌이나 판)를 가지고 김해공항 문화재 감정실에 들러 반출허가를 신청했다. 양맹준·최춘욱 감정위원은 이 묘지의 가치를 직감으로 알아챘다. 양 위원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물건은 못 나간다”며 불허했다. 묘지의 앞뒷면을 그리고 248자의 명문을 기록한 뒤 문화재 관리국(문화재청)에 제보했다. 공항 등에 그림을 보내 절대 반출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6월 김 모씨 등은 김포공항에서 이 묘지를 여행 가방에 넣어 반출했다. 세관원이 뇌물을 받고 눈감아줬던 것이다. 검찰이 일당을 적발했는데 벌써 묘지는 일본 골동품상에 팔아넘겨진 뒤였다. 9월2일 조선일보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양 위원의 그림을 게재했다.

그림 때문에 이 묘지가 필문 이선제(1390~1453) 선생의 묘지임이 밝혀졌다. 광주 남구 원산동은 필문 선생이 탄생한 광주 이씨 세거지다. 이 동네에 시 문화재인 필문 이선제 부조묘가 있다. 이 사당 위쪽 산기슭에 묘가 있는데, 묘지는 바로 1454년 만들어져 묘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마을 앞에 필문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년의 고목이 있는데 괘고정수라 불리는 왕버드나무다. 마을의 광주 이씨들은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나뭇가지에 북을 걸고 두드려 알리며 축하연을 열었다. 북을 걸어놓은 정자나무라는 별칭이 그래서 생겼다고 한다.

필문 선생은 세종 때의 사관으로 ‘고려사’를 개찬하고, 집현전 부교리로 ‘태종실록’을 편찬했으며, 강원도 관찰사와 호조참판 등 관직을 두루 거쳐 문종 연간 예문관 제학으로 활약한 호남 대표 문신이다.

세종 12년(1430) 광주사람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나 광주는 무진군으로 강등됐다. 21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 필문은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상소해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시켰다. 이 일을 기념해 ‘희경루’라는 누각이 지어졌다. ‘광주 향약’이라고 불리는 마을공동체 규약도 필문에 의해 실시됐다. 광주 북구 서방사거리에서 광주 남구 남광교까지 필문로라고 불리는 도로가 있다.

필문의 5대손인 이발과 이길 형제가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 불리는 기축옥사에 연루됐다 해서 광주 이씨 가문은 이후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됐다. 기록이 없어지고 필문은 잊힌 인물이 되었다. 정확한 생몰 연대마저 불분명해졌다.

묘지의 행방이 다시 드러난 것은 2014년 10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일본 파견 직원이 일본에서 이 묘지를 발견했다. 강임산 재단 팀장은 이 묘지의 출처를 조사하다가 조선일보의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일본에서 보내온 사진과 기사 속의 양맹준 감정관의 그림이 정확히 일치했다.

이후 3년 동안 재단은 일본 소장자인 도도로키 다카시 씨와 부인인 구니에 씨를 설득했다. 불법 도난품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필문 후손인 광주이씨 문중이 애타게 찾는 유물이며, 한국에 기증하면 명예로울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지난 8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기증식이 있었고 이 문화재는 국내로 환수됐다. 9월 20일부터 10월 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 전시됐다. 11월에는 국립광주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20년만의 귀향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필문의 생애와 가계는 물론, 제작 연대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 사료 가치가 크다고 한다. 보물 지정 절차도 거친다고 한다.

필문 이선제 선생의 묘지가 귀향하게 된 데에는 이렇게 눈물 나는 스토리가 있었다. 필문의 5남 1녀 가운데 막내인 이형원은 성종 10년(1479) 조선통신사를 이끄는 책임자인 정사로 일본에 파견됐으나, 쓰시마 섬에서 순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묘지와 함께 필문 선생 아들의 혼도 함께 되돌아온 것이다.

양맹준, 강임산과 같은 문화재 지킴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무상으로 반환한 일본인 부부의 명예로운 선의가 있었다. 광산 이씨 후손들의 절절한 염원이 보태졌다. 광주의 명예를 지켜주었던 선조의 자존심이 560여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어찌 기쁘고 경사롭다(희경)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도 1000년 전라도와 광주의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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