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시론] ‘인문학 수다’로 송년회를

조상열 (사)대동문화재단 대표

광남일보@gwangnam.co.kr
2017년 12월 11일(월) 18:18
각박하고 어려운 세상일수록 호쾌하고 허허로운 사람이 멋지다. 때문에 파격적인 해학과 유머는 서로 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이다. 풍부한 지식과 여유로운 성품이 아니고서는 즉흥적인 해학과 유머는 나 올수 없다. 그것이 풍류이자 바로 인문학이다.

조선 최고의 호남아(好男兒)는 백호 임제다. 평소 호방 활달한 성격으로 주색을 즐기며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38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던 그는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 탓에 절과 승려, 기생과 사랑, 세상을 풍자하는 해학을 다룬 시와 소설 등 다수를 남겼다.

죽음에 이르러 자식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황제를 칭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우리나라만 예부터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처럼 누추한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죽는다고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 곡(哭)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재기 넘치는 시인, 때로는 천군만마를 호령할만한 기백의 지사, 부귀명리를 멀리하고 산수와 기방, 저잣거리를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며 일세를 풍미한 그에게는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시조와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시조는 유명한데 그 중 평양의 명기 한우와 주고받은 취흥(醉興)이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그러자 한우가 기다렸다는 듯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풍류 대장부와 천하 명기의 정염은 뜨겁게 상통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상상에 맡겨둘 뿐. 임제가 28세 때 춘삼월 어느 날, 한양에서 술에 만취하여 수원 어느 주막집 주모와 눈이 맞아 하룻밤을 동침하다가 그만 주모의 남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남편이 칼을 들고 들어와 임제를 죽이려하자 모든 것을 체념한 그는 이왕 죽을 바에야 시나 한 수 짓고 죽도록 해달라고 청하여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어제 밤 장안에서 술에 취해 여기오니. 복숭아꽃 한 가지가 아름답게 피었네. 그대 어찌 이 꽃을 번화한 땅에 심었나. 심은 자가 그른가 꺾은 자가 그른가.”

임제가 시를 다 적은 후에 이제 죽이라고 목을 내밀었으나, 그는 임제의 호탕한 성품과 출중한 인품에 매료되어 오히려 술잔을 나누었다. 시 한수로 목숨을 구했으니, 이정도면 조선 최고의 풍류객이라 할 만하다.

임제는 절친 옥봉 백광훈과 유람하던 어느 날 개성에 들어섰다. 그들은 조랑말을 타고 다니면서 하루는 임제가 주인이 되어 말을 타면 옥봉이 마부가 되어 고삐를 잡고, 다음 날은 반대로 옥봉이 주인이 되고 임제는 마부가 되어 장난을 하면서 다녔다. 그날은 옥봉이 마부였는데, 개성 양반 댁에 들른 옥봉이 “주인을 모시고 한양을 가는 길인데 하루 쉬어갈까 합니다.”하자, 주인장이 “하룻밤 신세를 지려면 한시를 지을 줄 알아야 하오이다.” 했다. 마상의 임제는 마부인 옥봉에게 “이놈아! 시 한수 지어야만 밤이슬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운자(韻字)는 서울 경(京)이니, 네놈이 지어봐라” 하고 익살을 떨었다. 임제의 장난을 알아차린 옥봉이 즉시 붓을 들어 시 한수를 써내려가며 장단을 맞췄다.

“한양에 돌아가는 나그네가 개경을 지나는데 인적 없는 만월대 냇물만 성곽을 둘러 흐르네 오백년 도읍지의 일사는 가련하기만 하는데 사람은 간데없고 청산만 푸르러 두견새소리 무성하네”

시를 지은 마부가 옥봉 백광훈인지 알리가 없는 주인은 감탄한다.

“보배로다, 전라도에 백옥봉과 임백호가 천하제일 문객이란 소문은 들었지만, 오늘 하인의 시는 두 사람에게 필적할만하지 않는가.”

둘은 더 이상 주인을 희롱 할 수 가 없었다. 임제는 말에서 내려 “주인 어르신! 무례했습니다. 저 사람이 바로 백옥봉이고, 제가 임백호입니다.” 주인은 꿈인지 생시인지 놀라 반기며 세 사람은 날 새는 줄도 몰랐다.

풍류에도 질서가 있고 도덕이 있다. ‘청빈’ ‘낙천’ ‘우애’ 이 세 가지는 반드시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제대로 즐기려면 이 바탕위에 조건이 따르는데 사치스럽게 흐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치는 언제나 방탕과 난잡함을 불러오는 까닭에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儉而不陋 華而不奢(검이불루 화이불사)”,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 몸도 마음도 동분서주하는 연말연시이다. 화려한 음식과 음주가무 등의 질펀한 송년회 보다는 좋은 벗들과 도란도란 모여 앉아 넉넉한 풍류이야기 꽃을 피우는 것은 어떨까?. 백호 임제와 한우, 김삿갓의 흉내를 내면서 말이다.
이 기사는 광남일보 홈페이지(gwangnam.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gwangnam.co.kr/article.php?aid=1512983885274165000
프린트 시간 : 2025년 04월 22일 03:5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