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시론] 슬퍼할 자격이 있는가 천세진(문화비평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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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5일(월) 18:33 |
분노는 정의(正義)에서 촉발되었다고 믿었다.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잘못된 것들이 하나하나 바른 자리로 돌아가고 있고, 2017년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분명, 기뻐해야 할 한 해 같은데, 가슴 한편에 자리한 슬픔은 끝내 가시지 않는다.
누군가 광야에서 소리를 쳤다. 슬픔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외쳤다. 부패한 대통령, 부패한 기업인, 부패한 정치인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소리를 쳤다. 광야가 쩌렁쩌렁 울렸다. 광야 끝까지 외침이 퍼져갔다. 그 때 광야의 끝에서 무겁고 낮은 준엄한 소리가 울려왔다. “잘못 알았다. 슬픔의 정체는 그것이 아니다!” 얼음을 깨고 나온 소리처럼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소리였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세우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덩치 큰 배는 작은 낚시 배가 피해가리라고 믿었고, 힘 있는 자가 자신의 식솔 떨거지들을 자기 힘이 미치는 곳곳에 심었고, 소방차가 불법 주차 차량들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사람 가득한 건물이 불타올랐다. 슬픔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광야 끝에서 건너온 서늘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우리여! 답을 해보자. 어느 것이 슬픔의 정체인가? 광야의 첫 외침이 슬픔의 정체인가? 광야의 나중 외침이 슬픔의 정체인가? 우리는 살을 에는 광장에서 슬픔의 정체를 모두 밝혀내고, 치유의 방책도 얻어냈다고 믿었다. 거대한 분노와 슬픔의 강이 지나갔다. 강변에 가득 쌓인 쓰레기들을 치우고 나면, 세상은 건강을 회복하고, 나무들은 다시 맑은 공기를 내뿜어 세상을 푸른 기운으로 가득 채우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다. 믿음대로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슬픔의 정체는 이미 굵은 동맥을 지나, 정맥을 지나 모세혈관 곳곳에 퍼져있었다. 우리가 소리 높여 질타한 것은 동맥을 막은 두터운 혈전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슬픔의 정체는 아니었다. 모세혈관 곳곳에 녹아든 작은 것들이 슬픔의 진정한 정체였다.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아니, 그 정체는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한 얼굴들이다. 늘 우리 주변에 있어서, 눈만 크게 뜨면 슬픔의 정체를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차량 속 얼굴에, 여기저기 불법 주차해 놓은 차의 주인들 얼굴에, 어린 알바생을 희롱하고 착취하는 점주의 손길에, 정규직을 미끼로 비정규직 사원을 더듬는 손길에, 술을 먹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얼굴에, 주었다는데도 받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얼굴에 슬픔의 근원이 있다.
그 근원들이 바람이 불때마다 한 곳에 모이고, 거센 물결이 지날 때마다 한곳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것들이 애꿎은 목숨들을 수십, 수백 데리고 가고 나서야 그 사건을 ‘슬픔’이라고 불렀다. 자신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은 무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크게 어기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맞다. 우리는 크게 어기지 않았다. 부패한 대통령, 부패한 기업인, 부패한 정치인이 어긴 어마어마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것을 어겼을 뿐이다. 그런데 혹시 그 작고 사소한 것이 우리가 어길 수 있는 최대치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어길 수 있는 최대치가 딱 그 정도이고, 그것을 어겼다면, 힘과 권력과 부를 갖지 못한 서민인 우리라고 떳떳할 수 있을까.
부패한 대통령과 성추행과 거짓말, 온갖 탈법을 일삼는 저 부끄러운 정치인들을 누가 만들었나. 모두 우리가 만든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이 국민들 수준에 비해 너무 형편없다고 말한다. 그럼,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은 핀란드나 다른 북유럽 국민들과 같은 수준인데, 정치인만 하류인 것이 가능할까? 학생의 실력은 95점을 맞을 수준인데, 매번의 시험에서 30점을 얻는 것이 가능할까? 그건 불가능하다. 매번 30점을 얻었다면, 실력이 바로 30점이다.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에서 슬픔의 근원이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가 목도한 슬픔은 우리가 먹이고, 키운 슬픔이다. 그들이 주범이고, 그들의 하수인이 종범(從犯)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주범이고, 종범이다. 우리 스스로가 바뀌지 않는 한, 해가 바뀌어도 슬픔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음험한 슬픔이 골목에 대기하고 있다가 긴 혀를 날름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