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묘약 클래식’ 선사…40년 지역민 음악쉼터 [문화공간탐구] 광주 베토벤음악감상실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
2022년 03월 03일(목) 1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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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음악감상실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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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씨가 모은 LP음반과 CD, 각종 장비들. |
현재는 이같은 문화는 경험하기 힘들다. 옛 TV 드라마나 시대극을 통해서, 광주에서는 충장축제 골목길 투어에서나 누려볼 수 있다. 음악감상과 음악다방에 가야만 들을 수 있었던 음악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쉬이 접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금남로와 충장로에 여러 군데 있었다는 이 공간들은 어느새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 둘 자취를 감췄다. 오직 한 군데만 빼고.
광주 동구 금남로의 한 건물 6층에 자리한 고전음악감상실 베토벤은 옛 아날로그 감성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다.
1982년 5월부터 운영했으니 햇수로 40년째 문을 열고 있다.
그동안 여러 음악감상실이 문을 닫으면서 혼자만 남았다. 클래식 애호가들이 오가는 사랑방 구실을 해온 광주 유일의 음악감상실이자 금남로의 몇 안되는 곳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나무로 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과 명패가 맞아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겨운 주인장이 인사를 건넨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는 마룻바닥도 정겹다. 최근에는 겪기 힘든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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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5월부터 햇수로 40년째 문을 열고 있는 광주 베토벤음악감상실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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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공간 |
모과차를 주문하고 얼마 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브릿지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도 연주됐다. 첼리스트 무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와 피아니스트 벤자민 브리튼의 협연이 들려주는 선율에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연주가 끝날 때쯤 공간을 쓱 둘러보니, 정 가운데 레이스 가림막 사이로 주인장의 자리가 보였다. 그의 자리를 둘러싸고 빼곡히 찬 2500여 장의 클래식 LP 음반과 CD, 전축과 각종 장비들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 뒷편에는 80여 명이 함께 음악과 영화를 향유할 수 있는 감상실도 마련돼 있다. 요즘 웬만한 카페보다 큰 규모다.
이곳의 시작은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던 김종성씨에 의해서였다. YMCA 뒷골목(현 등촌 샤브샤브) 건물 4층에 문을 열었다. 베토벤에서 이름을 따온 것도 그때다. 베토벤이 청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명작을 많이 남겼는데, 몸이 불편했던 김종성씨가 베토벤의 음악으로 마음을 다잡은 게 계기가 됐던 듯 싶다. 그러다 김종성씨가 미국 뉴욕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이정옥씨가 지인과 함께 인수했다. 현재는 혼자 운영 중이다. 지금 자리로 이사온 것은 198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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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음악감상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5·18민주광장과 시계탑,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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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꾸준한 클래식 모임이 이뤄지고 있다. 광주 YMCA Y음악동우회가 전신인 베토벤고전음악감상동우회가 매주 음악을 감상했다. 요즘엔 금호고 교사로 퇴직한 안철씨가 프로그램을 기획,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15분과 토요일 오후 2시30분에 클래식 감상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오래 유지돼온 만큼, 위기도 있었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뻔 한 위기에 처하자 김준태 시인과 철학가 성진기 교수 등 단골 고객들이 도움을 준 덕이다. 40여 명의 회원들은 연회비를 내며 운영비를 보탰고,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면서 다시금 활기를 띨 수 있었다. 사람으로 인해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만큼, 추억도 많다. 학창시절 이곳을 방문한 이가 어느새 일가를 이뤄 다시 찾아온다. 이정옥씨는 그때마다 “방문객들로부터 같은 자리에 계속 있어줘서 고맙다”고 한결같은 말을 듣는다고 한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베풀어 준 따뜻함을 새삼 느낀다고 회상했다.
뿐만 아니라 안면이 없는 이들도 종종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2013년엔 다큐 영화 ‘법정 스님의 의자’를 본 사람들이 베토벤을 많이 찾았고, 일본의 시인 나스 마사노부도 이곳을 다녀갔다. 40년 가까이 이해인 수녀와도 인연을 맺고 있다.
요즘은 길어진 코로나19 여파로 문을 여는 게 힘들지만 그간 쌓인 내공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음악이 있어 평온함을 유지하며, 힘든지 모르게 2년을 훌쩍 넘겼다는 것이다. 이정옥씨는 앞으로도 베토벤음악감상실을 운영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클래식은 삶을 살아내는 데 꼭 필요한 묘약같은 존재예요. 많은 사람들에 음악의 아름다움과 그 속의 진정성을 선사해야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베토벤음악감상실을 운영할 겁니다.”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정채경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