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마지막 소원은 완전한 자주 독립"

광주백범기념관 ‘청년 백범 민주평화의 길’ 개최

송태영 기자 sty1235@gwangnam.co.kr
2023년 09월 06일(수) 18:28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정도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주제로 진행되는 ‘청년 백범 민주평화의 길’이 6일 첫 발을 내디뎠다.

(사)백범문화재단과 광주백범기념관은 이날 광주 동구 학동 광주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발대식 및 강좌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정영재 광주백범기념관장을 비롯해 60여명의 청년·대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기림으로써 민족공동체를 유지·발전시키고자 올해 처음으로 기획됐다.

우선 김은주 전남대 철학과 강사는 ‘김구 선생의 자주·민주·평화통일, 대한민국의 호국정신 계승·발전’ 강좌로 포문을 열었다.

김은주 강사는 “김구 선생은 인생 그 자체로 조선의 근현대사 교과서라 할 수 있다”며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가 도망자 신세가 됐고,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평양 근처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세운 후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며 “이후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광복군을 조직했다”고 언급했다.

김구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소개됐다.

김 강사는 “백범의 호는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왔다”며 “모든 사람이 높은 곳에 오르고자 싸우지만, 김구는 가장 낮은 곳의 가장 흔한 이름에 맞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청소부가 되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 “김구를 비롯해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독립 이후 국토가 38선을 기준으로 나뉘는 혼란이 있었다”며 “이에 김구는 김일성을 만나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1949년 경교장에서 안두희 암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 이듬해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민주평화로 가는 길은 김구 선생의 역사에 담겼다고 언급했다.

김 강사는 “김구 선생은 일제강점기하에 있는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하지만 독립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능력과 힘이 아닌 미국, 소련 등 강대국에 의해 쟁취됐을 때 우리나라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 도착한 이후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려고 했다”며 “김구 선생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다”고 덧붙였다.

광주백범기념관은 오는 12~13일 1박 2일 일정으로 민주평화탐방을 운영한다.

참가자들은 서울백범기념관과 경교장, 전쟁기념관,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칠곡 호국 평화기념관 등 주요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며 평화의 시계탑 ‘앉아있는 소녀의 시계 시간’ 맞추기, 충혼비에서 참배하기, 호국영웅 알아보기, 전투체험관 참여하기 등을 수행한다.

정영재 광주백범기념관장은 인사말에서 “아직 완전한 독립은 이루지 못했다. 남과 북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한 민족이고 한 국가이다”며 “이번 행사에서 백범 선생이 돌아왔던 길을 보면서 어떤 나라를 구상했는지 살펴봤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청년 백범 민주평화의 길’ 행사에는 (사)백범문화재단과 광주백범기념관이 주최하고 광주지방보훈청, ㈜세경S&T, 정도산업건설㈜이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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