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질 탐구…순수 자연과 어린이에 집중

[남도예술인] 서양화가 최재영
1989년 이후 회화세계 3기로 분류 변화 거듭
인간의 냉소적 허구성 조망…내면 탐구 주력
내실 치중…‘휴먼’ 연작 20점 완성 목표 매진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2024년 07월 18일(목) 18:25
인간의 냉소적 허구성을 조망해온 서양화가 최재영씨는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을) 시기별, 장르별로 분류해 남기고 싶은 작품을 선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수수한 표정에서 느긋한 화폭을 일궈가는 자의 여유 같은 게 읽혀졌다. 그를 보고 교류해온지 벌써 15년이 넘었다. 15년 동안 그는 한결 같았다. 헌팅캡 등 다채로운 검은색류 모자를 즐겨쓰는 모습과 수염이 그를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볼 수 있으나 예술적 촉수는 섬세하기 이를데 없다. 한때 인형을 모았고, 천진난만한 인형의 얼굴을 한 어린이와 어른아이가 화폭에 담긴 것만 봐도 금세 직감할 수 있다.

다행히 폭우 이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서인지 7월치고는 그렇게 뜨겁지 않은 17일 오후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광주 예술의거리 덕성필방 3층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주인공은 최재영 작가(서양화)다.

그는 늘 화폭 속 볼거리 많고, 사유거리 넘치는 만찬을 차려내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방문했던 날, 정말 깔끔하게 사용하는 작업실과 정돈된 화구들, 그리고 작품들의 배열이 그의 성품을 말하고도 남았다. 근황부터 묻는 다른 인터뷰와는 달리 그의 회화세계부터 물었다. 그의 회화세계는 제3기로 분류, 접근할 수 있다. 제1기는 첫 개인전이 열렸던 1989년부터 2000년까지로 잡을 수 있고, 제2기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다. 제3기는 2015년부터 현재까지로, 각 시기별 회화세계의 변화를 위한 고심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먼저 제1기는 그가 프로 화가로 발을 내딛은 시기로, 영국 유학(1994∼2001)을 빼놓고는 언급이 불가능하던 무렵이다. 그에게 영국 유학은 지역에서의 미술교육이 여러 답습에 함몰되고 전통적 교육문화에서 배워야 한다는 한계를 실감한 탓이 크다. 물론 그는 영국의 서양미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간 것인데 그곳에서 “서구적인 것을 하지 말고 너희 것을 해라. 서구적 재료는 쓸 수 있으나 정서적인 것은 너희 것을 표현하라”고 하는 조언을 듣고 충격 아닌 충격에 빠진다. 그것이 모토가 돼 현대미술 시장에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오히려 영국에서 광주의 것을 생각하면서 하다 보니, 작업이나 매뉴얼 등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는 술회다.

그는 영국에 오일(그림)을 배우러 갔는데 현지에서 “너희는 뭐가 재료냐”라는 질문을 받고서 먹을 생각해 냈다. 먹을 찾아낸 뒤 스크래치를 도입해 작업기법을 세웠다. 칼로 긁어내는 입체적 형태를 구축한 셈이다.

정신적으로는 오리엔탈 감성이어서 어둡고 슬프면서 무겁고 한게 예술의 본류로만 알았다. 그런 고정관념 또한 깨뜨릴 수 있었으니 영국 유학은 그에게 백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이후 그의 화폭에는 확연한 변화가 찾아왔다. 기쁘고 다이나믹하며 찰나적 감성들로 예술 개념이 확장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밝은 아이들과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순수성의 내면 탐구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One day’
이어 제2기에 나타난 그의 회화세계는 영국에서 광주 화단으로 돌아온 뒤 전개된 15년 간이었다. 영국에서 가져온 기법을 광주화단에 선보였으나 그리 호의적인 반응은 따라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광주신세계갤러리에서 귀국보고전(2000년 6월 먹 스크래치전)을 가졌으나 종이 조각이라고 하는 기법이 아직은 광주에서 낯설게 이해된 것이다. 광주에서 낯설어하는 방식을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어 ‘궤도 수정을 할 것이냐’의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2005년 전후 한 5년 동안 이 문제로 그는 굉장히 큰 혼란기를 보낸다. 작업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후 그는 국내에서는 아직 이해 폭이 좁다는 판단 아래 영국에서 하던 방식을 뒤로한 채 예술의 다양성과 인간이라고 하는 주제에 탐닉한다. 어둡고 무거운 상태에서 벗어나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 작업에 몰입한다. 여기서 아이의 얼굴은 순수의 상징이자 동화적 상상력의 은유로 읽힌다. 영국에서 박물을 모으는 수집 습성이 생겼는데 어느 날 수집한 컬렉션 중 무생물이지만 한 인형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아울러 인간의 냉소적 허구성을 읽어내고는 어린아이에 주목하면서 그의 화면이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진화를 구축한다.

마지막으로 제3기에서는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기성세대를 보게 된다. 동남아 같은 곳을 여행하면서도 어린 아이의 순수성을 지속적으로 발현해낸다. 이곳에서 순수 자연과 어린이를 동일시해 작업에 들어간다. 자연을 모티브로 작업하는 과정인데, 자동차를 타고 아이와 자연 숲 속으로 여행하는 꿈을 그림에 투영하게 된다. 얼굴 표정에는 코로나19에 갇혀 지낸 인간의 갑갑한 표정을 투영시키면서 일탈을 꿈꾸는 인간의 내재적 감정을 표현해낸 것이다.

‘Picnic’
‘Dream’
젊은 한때 아트페어같은 데 많이 출품하고 참여했지만 양 보다는 질, 내실에 치중하는 작업을 펼쳐보일 뜻을 내비치면서 진행해오던 미완의 작업을 마무리지을 생각임을 들려줬다.

“수채화 전문지와 판화 전문지 두가지를 활용한 100호 크기의 ‘휴먼’ 연작인데요. 20점을 목표로 현재 12점을 완성했습니다. ‘휴먼’ 연작은 제가 과거에는 남을 위해 그림을 그려왔다면, 제가 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작품이에요. 평가는 나중에 받되, 일종의 제가 저한테 헌정하는 작품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 싶어요. 이 작품은 1998년에 처음 시작해 2002년까지 진행하다 멈췄는데 2021년에 다시 시작됐어요.”

그가 해왔던 작품 속 등장인물은 특정 누군가를 정했다기보다는 액션이나 표정, 갈망에 집중하면서 지구촌의 보편적인 사랑이나 그리움, 크게는 한국적인 무언가를 찾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 ‘휴먼’ 연작 역시 그런 범주에 있지만 어둡고 무거운 정조가 지배한다. 영국에서 먹은 차이나라고 하지만 우리는 코리아 페인팅으로 호명했듯 먹 작업이 투영돼 독특한 지점을 이루고 있다. 먹 작업을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읽혔다. 그의 작품에서 주목되는 것은 인물 작업이다. 셰익스피어나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등인데 유화를 칼로 긁어서 한 작업이다. 또한 영국 전통 풍경 또한 마찬가지다. 2002년 영국대사관 후원 분당 삼성플라자갤러리와 인사동 모인 갤러리에서 ‘살면서 본 영국’이라는 주제로 선보여 호응을 얻었다. 스크래치 작업의 정수를 보여준 자리였다. 이 스크래치 작업은 칼로 긁는다기보다는 벗겨낸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어떤 것이 창의적이고 독창적일까’에 무게를 둔다. 화단에서 칼로 긁어내는 기법은 흔치 않은 작업기법인 것만은 틀림없다.

‘Fantasy’
그는 쉬운 길을 결코 걸어오지 않았다. 내면에서는 예술의 본질을 찾기 위한 여정이 지속되고 있다. 그의 작업들이 가져다줄 단단한 예술적 결기를 기대한다. 많은 선배분들이 나중에 작품 소장에 큰 문제를 맞는 것을 봤기에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해나갈 작정이다.

“5년 정도 시간을 들여 제 주관을 기준삼아 작품을 등급별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시기별, 장르별로 분류해 남길 작품을 선정하고 싶은 거죠. 모든 작품을 다 가져갈 수는 없잖아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정리를 다 못하고 가면 큰일 난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관심있는 분들이나 후배들, 후학들에게 나눠주고 꼭 남겨야 할 작품들은 남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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