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방직공장

고선주 문화체육부장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2024년 12월 01일(일) 18:18
고선주 문화체육부장
[데스크칼럼] 젊은 날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를 TV로 지켜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20세기 일제식민치하의 상징물이 해방 후 50년 동안 서울 한복판에서 ‘너네는 일본 식민지 국가였으니까 절대 잊지마’라고 말하는 듯하며 버젓이 존속된 셈이다. 살면서 여러 건축물이 해체되고 철거되는 과정을 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해체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해체라면 적극 지지 의사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해체는 별로 달갑지 않다. 문제는 역사적 가치가 높거나 이런 저런 상징성 때문에 보존이 돼야 할 건축물이 철거되는 것은 마음이 쓰리고 아플 수 밖에 없다.

최근 들어 뇌리에 들어온 공간은 단연 방직공장이다. 섬유제조업체로 5·18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대 전후만 해도 방직공장은 광주의 중요 산업 근간이었다. 광주의 방직공장은 1951년 설립된 전남방직㈜을 모태로 한다. 그러다 1961년에 일신방직㈜으로 분할 설립되면서 현재의 역사가 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도곡 들녘에 있는 신덕리 3구 마을과 능주의 남정리 1구 외딴 마을에 ‘종방’(일제시대 종연방적)이 있었는데 1935년 가네보방적이 이곳 들녘과 광주 임동에 공장을 세워 조선의 대마로 실을 잣는 큰 공장을 가동한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래서 9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남방직이 1970년대까지 전국 10대 기업에 들만큼 번성했고, 실제 방직공장에 다니는 친인척들을 보며 성장한 것 또한 사실이다.

광주의 근대 자산은 갈수록 쪼그라들다 못해 흔적 찾기마저 어려워져가는 형국이다. 현시대 변화하지 않은 것은 변화라는 단어 뿐인 듯하다.

최근 방직공장 철거가 시작됐다. 더 현대라는 쇼핑몰이 들어온다는 것보다는 철거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근현대 산업유산이자 한때 광주의 삶이었기에 그렇다.

그렇게 철거를 받아들이고 있을 무렵,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을 한강이 수상하면서 마음에는 변화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한꺼번에 세 개의 쇼핑몰이 필요할까’와 ‘현 정부의 갈라치기에 당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거둬들일 수가 없었다. 표를 얻기 위해 난사된 공약 중 하나가 아니었는가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하필 광주가 고향인 한강의 주요 대표작이 ‘소년이 온다’이다. ‘소년이 온다’는 실제 5·18 항쟁의 문재학 열사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대서사가 전개된다. 소설 속에서는 동호로 등장한다. 동호는 정대의 친구다. 소설 속 2장 ‘검은 숲:정대의 혼’에 보면 동호의 친구인 정대의 누나나 5장 ‘밤의 눈동자’에 보면 5·18 당시 트럭 스피커 선무방송 장본인인 임선주 역시 방직공장 출신들이다.

그러니까 옛 전남도청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5·18항쟁이 일어났던 광주의 공간은 모두 소중한 것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향으로 불리던 광주문학이 ‘속 빈 강정’이 아니라 속살을 가득 채우게 된 일대 사건이지만 소설 속 공간으로 언급됐던 방직공장은 재개발 앞에 현재 철거 중이다.

아이러니하게 관공서 건물과 거리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축하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는 데 말이다. 철거된 여러 동의 건축물 잔해가 눈에 들어오고, 오랜 시간 방직공장과 함께 해온 울타리의 나무들도 베어졌다. 훗날 ‘이곳이 방직공장 터입니다’라고 해야 할 판이다.

필자는 공장 건물 몇동을 활용해 ‘광주비엔날레 임동 전시관’을 구축, 광주의 산업유산을 활용하고 그것이 함의하는 상징성과 역사성을 확보하길 광주시 관계자와 지면을 통해 수차례 요구해 왔다. 그리고 하천 구실만 하는 광주천의 서사도 방직공장이 존속돼 둘이 묶여 되살려지길 기원했다.

그래서 베니스와 휘트니, 카셀, 바젤, 뉴욕, 파리, 런던, 두바이, 싱가포르 등지에서 우리의 비엔날레 공간을 연구하고 모델로 배워가게 하면서 자긍심이 한층 더 고양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희망 시계는 거꾸로 간다.

광주가 쇼핑몰이 없어 인구가 줄고 경기가 침체됐다고는 믿지 않으며, 반대로 경양방죽을 메운 뒤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도시가 됐다고도 믿지 않는다. 내년에는 광주 인구가 140만이 무너진다는 어두운 전망도 제기되고 있는 마당이다.

요즘 광주읍성(성격이 약간 다르겠지만)을 위시로 경양방죽과 남광주역사가 자주 오버랩된다. 옥상에 올라가 방직공장을 사진에 담아내는 게 일과의 하나가 됐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는 광남일보 홈페이지(gwangnam.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gwangnam.co.kr/article.php?aid=1733044695493914000
프린트 시간 : 2025년 03월 10일 18:2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