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 백승현 대동문화 전문위원 광남일보@gwangnam.co.kr |
2025년 02월 20일(목) 1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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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대동문화 전문위원 |
매화 여행은 인문, 예술, 역사 답사이기도 하거니와 생태 체험이며 감성, 치유 여행이기도 하다. 눈 내린 산중으로 겨우겨우 매화를 찾아가 꽃망울을 감상하는 여행을 심매(尋梅)라 한다. 매화가 만개했을 때 가는 지각 여행은 탐매(探梅)라 한다.
매화나무는 내한성이 약해서 주로 따뜻한 남부지방에서 많이 심어 감상했고, 매실을 수확해서 가용에 보탰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가 압도적인 매화나무 주산지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는 문 열고 나가면 매화 여행지니 탐매객들의 정조준 여행 명소가 아닐 수 없다. 남도는 매화의 본고장이다.
남도엔 사찰들이 즐비해서 절마당엔 아주 오래된 고매(古梅)들이 많다. 전남 순천의 금둔사 납월매는 가장 먼저 매화를 볼 수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경남 통도사 자장매의 향기가 유현하기로 손꼽는다. 스님들은 매화 감상의 기쁨을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의 황홀경, 즉 선열(禪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예향 광주전남에서 예술가들과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선비들이 또 많이 유배 온 곳이라서 그들이 심어 감상한 매화가 그득하다. 남도 곳곳의 별서와 정자, 원림엔 반드시 매화나무로 조영한 감상 포인트가 있다. 영암 왕인매, 담양 식영매, 장전매, 지실매가 있다. 화순 임대배, 장성 고산매가 유명하다. 화순 죽수매와 임대매 앞에 서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광주 환벽당매, 무등산 자락의 의재 허백련 선생의 예혼이 깃든 춘설헌의 춘설매도 빠질 수 없다. 전남대학교 교정 안의 대명매는 시민 누구나 사랑하는 매화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울진 불영사와 영주의 소수서원,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의 매화도 여행 테마의 하나다. 호남에는 5매라고 해서 백양사 고불매, 담양 지실 계당매, 전남대 대명매, 소록도 수양매, 선암사 선암매를 꼽는다. 물론 ‘호남 5매’를 이름한 것은 호사가들이지, 누가 기준을 정한 것은 아니다. 생명엔 우열이 없다.
어떤 문인화가는 매년 지인들과 함께 탐매 여행을 한 달 내내 계속하면서 스케치한다. 어느 날 매화에 대해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매화나무에 꽃이 피는데 어떤 때가 가장 그림 그리기 좋으냐고 물었지? 매화는 전체 꽃이 100이라고 하면 20~30 프로 정도 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때가 가장 그림 그리기가 좋고 보기도 좋다네. 이때가 매화나무 한해살이 중에서 가장 아슬아슬하고, 가장 감성 에너지가 크고, 가장 향기가 강해, 사랑을 하기 좋을 때라네. 매화가 만개한 매화나무는 식상하다네.”
조선시대 전기라는 화가의 ‘매화서옥도’, 신잠의 ‘설중탐매도’, 김홍도의 ‘매작도’, 어몽룡의 ‘월매도’, 조희룡의 ‘홍백매도’를 눈여겨보면 화가의 이 말이 사실인 것을 알 수 있다.
매화를 감상하려면 우선 마음의 채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매화를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매화의 암향(暗香)에 오래 잠겨 있으면 매화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경지에서 옛 선인들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유배지 강진에 귀양 온 지 13년째 즈음,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부인 풍산 홍씨가 시집을 올 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를 보내왔다. 다산은 이렇게 적는다. “내가 강진으로 귀양 온 지 여러 해가 되자 부인 홍씨가 낡은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이것을 오려서 서첩 네 책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작은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보내주었다.”
치마를 보내온 아내의 마음은 “당신이 지금 유배라는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며 지내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딸에게 보낸 그림이 ‘매화쌍조도’다. 오른쪽 위에서 내려온 매화나무 두 가지 중 아래 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금슬이 좋은 텃새인 참새 두 마리는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다. 갓 결혼한 딸 내외를 그린 것이다. 새 위로 드리운 도타운 가지는, 딸 부부가 있는 아래 가지를 보호하려는 부모의 마음이다. 즉 다산 부부의 마음이다. 매화에 이어 터져 나올 잎들은 잎눈 속에 감춰져 있다. 자식을 상징한다. 딸 부부가 다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림에 함축되어 있다.
그림 옆에 시를 적었다. ‘훨훨 날던 저 새가/내 뜰 매화 가지에 머물렀네/밝고 고운 꽃향기를/다소곳이 찾아온 것인가/여기 머물다 여기 살면서/네 가족 모두 즐겁게 지내렴/꽃이 벌써 활짝 폈으니/그 열매도 탐스럽겠지’
갓 혼인한 딸의 신혼을 격려하는 뜻이 담긴 아버지의 축시다. 매화를 소재로 이렇게 멋진 서화 작품을 창작해 그 속에 따뜻한 인간애를 담아낼 수 있다니 그 예술 감각이 경이롭기만 하다.
맑고 청아한 매화 향기다. 눈 속에서도 봄기운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고단한 시절에 강인하고 곧은 정신을 선보이는 매화나무다. 그래서 조선 절의 선비 상촌 신흠은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희망의 봄을 준비하고 담금질해야 한다. 새 봄을 절대 포기할 순 없다.
우리는 지난 한해와 올해 너무도 많은 힘겨운 일을 겪었다. 추위는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과 삶까지도 파고들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겨울을 뚫고 나가야 한다. 봐라! 매화는 저렇게 희망의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지 않은가. 매화 너는 우리의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