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예술 세계에 알려야…좋은 작품 제작 노력"

[남도예술인] 한국화가 채관병
연진회서 기본기 닦고 亞서 대가들 접해 세계 확장
40년 넘게 수묵 작업…‘전통사상과 현대문명’ 투영
달항아리서 청자 구현…"정말 작품다운 작품 각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2025년 04월 10일(목) 17:58
‘청자기린형뚜껑향로’
그의 작업실은 나주 혁신도시 스마트파크 지식산업센터에 자리하고 있다. 5층 그의 작업실을 가기 위해 건물을 잘못 찾아들기도 했지만 그의 작업실에서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평수로 보였다. 어림잡아 30평은 넘어 보였다. 작업실이 정돈이 잘돼 보였다. 그의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주인공은 한국화가 채관병씨. 이름이 범상치 않아 잊히지 않을 이름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외관상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처럼 자리잡았다. 무작정 수염 깎기가 귀찮아서 자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수염을 기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전남대 대학원 미술학과를 수료한 뒤 다시 석사과정으로 조대 대학원 순수미술학과를 마칠 무렵인 1999년, 고향인 담양 대전면 소재 논의 벼들이 태풍이 불어와 모두 쓰러졌을 때 세우는 작업 중 쥐들의 배설물에 오염된 새집 같은 것을 건들어 렙토스피라라는 유행성 출혈열에 감염된다. 예전에는 감염되면 치사율이 높은 감염병이 걸렸다고 이해하면 된다. 25일만에 20㎏가 넘는 몸무게가 빠졌을 만큼 그는 건강이 적신호인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었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면도할 엄두를 내지 못해 기르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세상에 대한 시각이 감염병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는 귀띔이다. 이런 계기로 수염을 길렀지만 함께 갑옷 같은 한복도 입었을 뿐 아니라 하얀 고무신 같은 것을 신고 다니게 된 것이다.

그의 그림 인생을 유추해볼 수 있는 소개 책자에 수록된 사진 역시 양복차림에 흰 수염, 그리고 중절모를 쓴 모습이 잘 조화돼 멋져 보였다. 그의 회화인생을 듣다보니 생사의 기로에 놓였었다는 것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두 군데 대학에 걸쳐 다녔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전남대 대학원 미술학과에서, 또 하나는 조선대 대학원 순수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각각 전공했다. 공부에 대한 열의가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중요한 점은 그가 그림 공부를 제대로 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고교 시절 미술에 눈을 뜬 것으로 여겨진다. 전남기계공고에 재학하던 1학년 시절 자신이 소속한 6반 위에 미술반이 자리했다. 당시 미술 선생은 ‘에뽀끄’ 창립 멤버로 비구상 활동을 펼쳤던 최종섭 선생이었다. 같은 반 동급생 5명이 미술반 소속이었다.

‘분청사기음각어문편병’
‘백자달항아리 백자대호’
이런 저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미술을 접하고 집중하게 된 것이다. 최 선생님께서 미술에 소질이 있으니 한번 해보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미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 무렵 그는 또 배고픈다리 인근으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연진회가 자리했다. 연진회를 다니게 된 계기가 됐다. 1년 이상을 다녔는데 그때 사군자나 십군자 등을 그리면서 가장 기본적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훗날 그의 기본기를 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듯하다. 이것 외에 청동미술학원에 다니며 조대 서양화과를 나온 이영식 선생 밑에서 실력을 연마한 것 또한 그가 기본기를 다지는 기회가 됐다. 게다가 집안이 한학에 조예가 깊어 부친께서 유년시절 글씨를 어깨 너머로 보면서 자란 점 또한 그가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연진화를 거친 것은 그가 다른 동급생들에 비해 기본기가 탄탄한 이면이 됐다.

“연진회에서 실력을 쌓았던 게 기본적인 공부가 됐던 거예요. 수묵 작업(담채)에 있어서는 제가 실력이 탄탄했다고 볼 수 있어요. 다른 사람보다는 수묵 작업이 제가 조금 앞서 나가서 초창기 때는 완전 수묵 작업을 하다시피 했죠. 대학 때 또 수묵을 배울 수 있었구요. 후에 전북대로 옮겨가신 송계일 교수님으로부터 수묵을, 윤애근 전남대 교수로부터 채색을 각각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동시대 같이 입학했던 분들에 비해 미리 그림공부를 다양하고 깊이있게 해와 어느 정도 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그때 그 무렵에 유망주 내지는 미래가 촉망되는 화가로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공모전을 많이 응모하는 시대적 풍토가 있었는데, 작품이 좋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던 모양이다. 광주시전이나 전남도전 등에서 특선 같은 것을 몇번하고 나서 추천작가가 됐다. 일단 미술대전 같은 데서 입상을 했지만 대학 졸업 후 그는 먹고 살아야 하기에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광주시 남구 봉선동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5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은 회화세계에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장석원 전남대 교수가 감독으로 작가 선정 작업시 보조로 따라붙어 중국 등 11개국을 방문하면서다. 수묵인물화가인 북경 노신미술대 왕성열 교수(총장)를 위시로 수묵인물화의 거장이자 국보급 작가로 통하는 오관종 선생, 중앙미술학원 가우복 교수 등을 만날 수 있었고, 이어 대만의 관집중 작가와 싱가포르의 진서헌 작가 등까지 섭렵했다.

또 교과서에 나오는 명나라 때의 문징명이나 당나라 때의 고개지 등 거의 보기 힘든 실물을 수도박물관이나 고궁박물관 수장고를 방문해 직접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작가는 백두산만 7회를 방문했고, 중국 내륙 깊은 곳을 빼면 옥단강에서부터 광동성까지 두루 누볐을 정도로 중국통이 된 듯하다. 운남성 쿤밍이라는 곳에서 초대를 받아 열렸던 전시에 출품했던 ‘옥룡설산’은 그 덕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경사를 누리기도 했다.

‘청자매죽난석학문병(오우가)’
‘보배’
한국화가 채관병
이처럼 다양한 미술족적을 형성해온 그의 회화는 한국적 사고에 기반한 전통사상과 현대문명에 기반한 사유들을 바탕으로 한 회화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세 시기로 나눠 접근해 볼 수 있다. 제1기는 대학 졸업 후부터 2004년까지, 제2기는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제3기는 2020년부터 현재까지다. 그의 작업 기조를 이뤄온 것은 수묵작업에 기반한 전통 산수와 실경 산수다. 전통 산수는 관념적이고 사의적이며, 실경 산수는 현장 스케치를 나가서 그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제1기 때는 이를 기반으로 전통 산수 위주의 그림을 많이 그렸었다. 연진회를 포함한 대학과 대학원 시절, 그리고 첫 개인전 때까지가 거의 이 1기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실경산수 위주로 작업을 많이 구사했다. 작가는 실경산수를 하면서 전남 구례 등 전국을 엄청 돌아다니게 된다. 스케치 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실경산수에 빠져나오지 못할 듯한 그의 회화는 2009년 쯤 그림보다는 유물에 몰입해 지내게 된다. 그후 서울 인사동에 한동안 머물다 2020년께 97세 되던 모친이 별세하자 고향인 담양 시골집으로 내려온다. 코로나19 동안 그곳에서 그는 어디를 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되다 보니까 그곳에 머물며 작업을 조금씩 진행해 나갔다.

풍경화 위주로 하다가 ‘이제 과거에 했던 것을 그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변화를 추구한다. 그게 도자기였다. 도자기 공부를 했고 도자기에 감정된 일을 하게 되면서 처음에 달항아리를 그리게 된다.

그런데 요즘 달항아리를 그리는 작가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면서 변별력이 생기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려보고 이건 내 것이 아니구나’ 싶어서 책을 보면서 상당히 감동을 받은 고려 청자나 분청사기에 몰입해 탐구를 지속했다.

앞으로 작가는 청자 위주로 작업을 하는데 청빛을 만들어야 하는데 평소 친분이 있는 담양 소재 홍익 바이오텍의 조규성 대표로부터 우리나라 전통 안료를 가공을 하는데 전 세계에 있는 색깔이 있는 돌들을 가공 하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중 니켈석을 분말로 만들어 아크릴하고 혼합을 해서 빛깔 내기가 어려운 청빛을 얻는다고 한다.

“앞으로는 대작도 많이 할 겁니다. 옛날 오관중 선생이 작은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의 그림을 그리는 게 화가라고 했단 말이 기억나네요. ‘정말 작품다운 작품을 하는 게 예술가’라는 말인데 이를 되새기며 작품활동을 해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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