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국립광주미술관을 위하여

윤익 광주시립미술관장

광남일보@gwangnam.co.kr
2025년 06월 26일(목) 17:55
윤익 광주시립미술관장
[문화산책]한국 미술사에서 광주, 나아가 호남 지역은 독자적이며 굵직한 흐름을 형성해온 중요한 축이다. 이 지역의 미술은 지역 작가들의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정신을 관통하며 공동체의 기억과 현실을 함께 호흡하는 예술로서 자리매김해왔다. 광주는 곧 전통과 저항, 실험과 연대의 도시이며, 한국 미술이 지닌 다층적 면모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중심지로서 한국 회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소치 허련을 필두로 20세기 근대기를 대표하는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지는 회화의 전통은 자연과 정신을 하나로 보고 내면을 성찰하는 문인화의 미학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양식적 계승을 넘어서, 예술을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로 여긴 호남 화단의 정신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근·현대미술에 있어서도 호남은 서양화 분야에서도 구상과 추상미술의 토착화를 통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오지호, 김환기 등 호남 출신 작가들은 형식의 수용에 그치지 않고, 한국적 정서와 사회적 메시지를 미술 속에 녹여낸 창조적 실천자들이었다. 또한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를 중심으로 나타난 민중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이룬 역사적 사건이자 예술운동으로, 이 역시 국가 차원의 심층 연구와 보존이 반드시 필요한 분야이다. 당시의 참혹한 현실은 예술가들에게 침묵할 수 없는 시대적 물음을 던졌고,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은 곧 현실참여미술, 즉 민중미술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광주는 민중미술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지역의 작가들은 공동체의 아픔을 직시하고, 판화·벽화·현장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예술과 삶을 연결하는 작업을 전개했었다.

광주의 예술은 언제나 공동체적 특성과 참여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작가중심의 전시문화, 예술공동체의 자생적 조직, 그리고 사회적 이슈를 예술로 풀어내는 문화적 태도로 이어졌다. 개인의 기량보다 함께 만들어가는 연대와 시대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은 오늘날까지 광주 예술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이러한 흐름은 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아시아 최초 비엔날레로 기록된 이 전시는 광주를 세계 현대미술의 무대로 끌어올렸고, 지역미술에 실험성과 국제성을 결합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광주비엔날레는 도시 공간 전체를 무대로 삼고,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며 예술과 도시, 시민의 관계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후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 같은 복합문화기관의 등장과 유네스코 미디어아트창의도시 선정 또한 광주 미술의 확장성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광주지역 미술계는 지금도 꾸준히 작가 중심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양한 사립미술관과 대안공간 등의 민간 주도 전시공간은 지역 작가들의 창작과 발표를 꾸준히 지원해왔고, 공동체 기반 프로젝트들이 운영되어 지역 미술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호남미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기록하며 체계화할 수 있는 국가 단위의 미술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편중된 국가 미술관의 구조에서, 지역의 미술사는 여전히 ‘주변’에 머물고 있으며, 호남미술 역시도 단편적 연구와 전시 위주의 접근에 머무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국립광주미술관이 설립되고, 그것이 광주미술의 역사와 현재를 아우르는 전문 연구·기록·전시 기관으로 기능해야 할 당위성은 분명하다. 광주는 전통 회화의 정신성과 현실참여적 미술의 실천, 국제적 실험미술의 장으로서 자생적 미술생태계를 품고 있는 보기 드문 도시이다. 이처럼 역사성, 사회성, 예술성, 공공성을 두루 갖춘 광주의 미술사적 배경은, 향후 국립현대미술관의 광주관 설립에 있어 그 정당성과 문화적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해주는 근거가 될 것이다.

어느덧 광주는 지역미술계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질문과 실천이 가장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예술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광주는 이처럼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진 도시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주관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과 민주주의, 지역성과 세계성이 만나는 결정적 지점을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광주만의 도시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미술관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국립미술관이 중심과 수도권에 치중된 예술 담론을 생산해왔다면, 광주관은 ‘지역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역동적이고 참여적인 예술의 생태계를 구현하는 국립미술관이 될 것이다. 이처럼 광주의 역사성과 예술성, 공동체성과 실험성을 융합한 ‘광주관’이 추진되면 국립현대미술관 전체의 균형 발전과 국가 문화정책의 미래를 제시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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