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요, 화순 청풍초 전교생 23명 시네마천국 배우

박기복 영화감독

광남일보@gwangnam.co.kr
2025년 08월 21일(목) 17:31
박기복 감독
[문화산책] 2달 넘게 화순 청풍초 ‘청풍 할리우드 영화학교’ 제작을 진행했다. 기획, 작법, 쓰기, 카메라 실습, 연기, 미술 소품, 촬영에 이르기까지 원스톱으로 진행된 과정은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와 전쟁이었다. 청풍초는 인구소멸 범위에 드는 위기의 작은 학교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고작 23명이다. 이들 어린 영화인들이 배우와 스태프 역할을 병행하면서 제작한 어린이 장편영화는 대한민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낸 화순 청풍초 어린 영화인들이 제작한 영화 ‘할머니와 나와 민들레’의 대장정을 마쳤다.

장편영화 ‘할머니와 나와 민들레’는 화순탄광 폐광을 소재로 치매를 앓는 할머니와 손녀 예슬의 이야기다. 예슬은 맞벌이 농장일을 하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를 돌본다. 할머니는 예슬과 등하교를 하는 청풍초 학생으로 설정했다. 정신이 아픈 할머니와 학생들 사이에서 예슬은 갈등을 겪지만, 폐광 탐방을 통해 화순탄광의 역사와 광부로 일한 할아버지의 땀과 희생을 알게 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성장영화다.

화순탄광은 대한민국 1호 탄광으로서 화순의 경제 부흥과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화순탄광은 일제 강점기인 지난 1905년 문을 연 지 118년 세월을 마감하고 2023년 6월 30일 자로 완전 폐광에 들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화순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탄광의 존재를 소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네 아버지와 아버지의 땀과 희생의 일터였고 자식들은 탄 밥을 먹으며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순폐광 영화 소재는 학생들에게 낯설지만 궁금하고 호기심과 상상을 자극하기에 좋은 재료였다. 필자 또한 학생들이 자신들의 고장인 화순 지역의 역사를 알아가고 광부들의 땀과 희생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보람되고 뜻깊은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갔다.

어린 학생 영화인들은 연기와 연출, 촬영, 오디오, 슬레이트를 치면서 제법 촬영장다운 분위기를 이어가다가도 금세 지치기를 반복했다. 철길 레일이며 도로는 삼겹살 불판처럼 달궈진 땡볕 탓이었다. 전문 영화 스태프도 견디기 힘든 환경이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어느 정도 예견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간의 영화 현장 경험과 진행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밀어붙였다. 영화 현장은 돌발변수와 함께 도전과 모험적 요소가 곳곳에 설치된 부비트랩처럼 위험과 위기 상황에 직면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악조건은 인내와 집념과 문제해결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자는 위험 요소나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낮은 학교 운동장이나 교실을 배제하고 야외 로케이션을 선택해 어려움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잊지 못할 성장통의 기억과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당장은 힘들어 울고 싶고 도망가고 싶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면, 어린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는 천만 관객보다도 더 값지고 소중한, 어린 인생의 사회성을 배우는 계기가 되리라 믿었다.

촬영 내내 어린 영화인들을 지켜보는 필자는 신기하고 경이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시루 속 콩나물처럼, 대숲의 죽순처럼 그 자리에서 날마다 무럭무럭 눈에 띄게 발전했다. 어린 영화인들의 대사와 표정 연기는 날로 늘고 촬영, 오디오 기술 습득은 놀랄 만큼 빠르고 즐겁고 유쾌했다. 필자는 땡볕 아래 선명히 드러난 어린 영화인들의 나이테를 보았다.

영화 마지막 촬영 로케이션이 진행 중인 화순탄광 위령탑에 김대중 전라남도 교육감이 방문했다. 작년 전남도교육청에서 개최한 ‘제1회 작은 학교 영화·영상제’에 청풍초 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 학생 감독과 대화에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폭염의 먼길을 찾아왔다. 그리고 약속대로 희생 광부들을 위한 학생 밴드 연주 지휘를 하는 음악선생님 역을 맡았다. 비록 짧은 카메오 출연이지만 신인배우 탄생의 순간은 오래 남을 것이다.

필자는 그날 교육감과 학생들의 한 컷 프레임 속에서 교육과 교육자의 마음 자세와 ‘약속’과 ‘기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린 학생 감독은 별 생각없이 부탁했을 수도 있고 교육감 또한 지나가는 말로 약속을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교육감은 그날의 약속을 기억해두었다가 촬영장을 찾아준 데 대해 무한한 진심을 느꼈다.

약속이란 신뢰의 다른 말이다. 어린 영화인들이 받아들였을 그 날의 감동은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변방의 작은 학교 촬영 현장까지 찾아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는 일은 어린 영화인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의 화순 청풍초 어린이 영화인과 김효관 교장 선생님, 박선화 선생님, 배우와 스태프가 되어주신 모든 선생님, 무더운 여름 고생 많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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