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도 사랑도 뜨거웠던 '은막 여왕'…한국 영화사 쓴 김지미 트로이카 앞서 당대 최고 미녀로 꼽혀…원조 팜므파탈·자유로운 신여성
연합뉴스@yna.co.kr |
| 2025년 12월 10일(수) 1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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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700여편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끈 원로 영화배우 고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10일 영화계에 따르면 김지미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인협회는 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을 준비 중이다. 사진은 영화 ‘고독한 순간’에 출연한 배우 김지미 모습. 2025.12.10 [한국영상자료원 KMDb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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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700여편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끈 원로 영화배우 고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10일 영화계에 따르면 김지미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인협회는 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을 준비 중이다. 사진은 데뷔작인 ‘황혼열차’에 출연한 배우 김지미 모습. 2025.12.10 [한국영상자료원 KMDb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연합뉴스. |
당시 보수적이던 사회상과 달리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이어가며 주체적 삶을 살았던 ‘신여성’이기도 했다.
김기영 감독이 길거리 캐스팅으로 발굴한 김지미는 ‘토지’(1974), ‘육체의 약속’(1975), ‘길소뜸’(1985) 등 60년간 공식 기록으로만 37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출연작이 하도 많아 정확한 숫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김지미는 2017년 기자회견에서 “아마 700편 이상에 출연했을 것”이라며 “700가지의 인생을 살았던 만큼, 역할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했다.
김지미는 윤정희, 문희, 남정임이 우리나라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하기 전부터 활동했지만, 선후배 배우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1980년대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특히 1960년대에는 1년에 많게는 34편의 영화를 촬영해야 해 하루에도 몇 편씩 ‘겹치기 촬영’을 해야 할 정도였다.
김지미가 비교적 오랜 시간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뛰어난 외모도 한몫했다.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이미지와는 달리 입체적인 얼굴을 자랑했던 그는 당대 최고의 미녀로 꼽혔다. 아름다운 신인 여성 배우가 등장하면 영화계나 대중은 “그래도 김지미만 못하다”는 말을 할 만큼 김지미는 미를 판가름하는 척도였다.
트로이카의 세 배우가 젊고 풋풋한 매력을 내세웠다면, 김지미는 노련한 여성미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다. 영화계 ‘팜므 파탈’의 원조인 셈이다.
그는 영화에 큰 관심이 없던 때 얼떨결에 배우가 됐지만, 연기력 또한 뒤처지지 않았다.
김지미와 13편의 영화에서 호흡한 김수용 감독은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토록 자연스러운 연기를 했던 걸 보면 연기는 그의 큰 특기였던 듯하다”며 “‘진짜 배우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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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배우 김지미, 85세 일기로 별세…영화인장 준비(서울=연원로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10일 영화계에 따르면 김지미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인협회는 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을 준비 중이다. 사진은 2017년 6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특별전 기자간담회 당시 배우 김지미(오른쪽) 사진 왼쪽은 김씨가 전성기였던 1975년 대종상 시상식 당시 여우주연상을 탔을 때 모습.연합뉴스 |
그가 연기한 ‘장희빈’(1961·정창화)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장희빈’들의 교본처럼 여겨졌고, ‘불나비’(1965·조해원)에선 살인 사건의 중심에 선 여인을 연기하며 도시적 이미지와 ‘팜므파탈’의 매력을 각인시켰다.
1970~80년대에는 무르익은 연기력으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는 ‘토지’(1974·김수용)에서 대지주 가문을 이끌어가는 안주인 윤씨를 연기해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영화 ‘만추’의 리메이크작 ‘육체의 약속’(1975·김기영)에서 사랑에 빠진 죄수 효순 역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산가족 아들을 찾아 나선 중년 여성을 연기한 ‘길소뜸’(1985·임권택)은 고인의 필모그래미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완숙한 연기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영화제작사 지미필름을 차려 ‘티켓’(임권택·1985), ‘명자 아끼꼬 쏘냐’(이장호·1992) 등 7편을 제작했다. ‘명자 아끼꼬 쏘냐’는 그의 마지막 주연작으로 남았다.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2010년 핸드프린팅 행사에서 김지미에 대해 “한국 영화의 산증인”이자 “진정한 한국 영화인”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영화계의 유명한 여장부로 통했던 김지미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했다.
그는 18세였던 1958년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다가 4년 만에 이혼했다. 당대 인기 배우 최무룡과의 결혼과 이혼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최무룡은 당시 이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겨 회자했다.
이후 김지미는 나훈아와의 결혼 발표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고, 그와는 6년 만인 1982년 사실혼 관계를 정리하고 헤어졌다. 1991년에는 심장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으나 2002년 다시 이혼했다.
이로 인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인 그에게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칭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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