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경탄하며 살 수 있는 세상

정홍순 시인(순천희락교회 목사)

광남일보@gwangnam.co.kr
2025년 12월 31일(수) 14:25
정홍순 시인목사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시작한다. 유난히 힘들었던 한 해였다. 난데없는 계엄선포로 나라 안팎이 꽁꽁 얼어붙은 한 해였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기운을 모두가 잘 받아낸 한 해이기도 하다.

통치자의 실정으로 온 나라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다행히 우리의 가치관인 민주주의와 문화, 역사를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특히 정치와 종교의 타락을 보았다.

정치와 종교를 통하여 ‘경악’을 금치 못 했다는 것은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린 까닭이었기 때문이다. 물이 잘 흐를 수 있도록 하여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정치와 종교의 본연의 의무일진대 서로 결탁하여 이념을 조장하고, 나라를 어지럽힌 사악함을 청산해야 할 과제가 남았다.

우리나라 정치와 종교의 치명적 치부는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정치와 종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조장하고 군림하는 교묘한 장치를 쓰고 있는데 속히 끊어내야 한다. 냉철한 이성이 필요한 것이 두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와 종교는 ‘무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무속이라는 수단을 쓰는 순간부터 부패는 시작되고 온갖 패악 질이 난무하기 십상이다.

「절명시」4수를 남기고 순절한 매천 황현 선생은 무당을 궁궐로 불러들여 푸닥거리하고,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릴 뿐만 아니라,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둔 저축미를 1년 만에 거덜 내고, 국사를 유린한 명성황후를 가리켜 “죽을 때 죽을 자리만 잘 만난 요망한 인간”이라고 한탄하였다.

무속이라는 민간신앙의 뿌리를 단박에 도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당정치로 정권을 바꾸는 행위가 있었다 해도 국가의 이념이 될 수는 없었다. 명성황후와 같은 제1, 제2의 요망한 인간들이 척결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구안록』에서 “믿어서 더욱더 진리가 밝아지는 것을 신앙이라 하고, 더욱더 어두워지는 것을 미신이라 한다.”고 했다. 이는 조화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환희가 없는 것이라 일갈한 말이다.

조화는 무엇인가! 하늘과 땅, 인간과 인간의 옮음의 태도이며 삶이 조화다. ‘이치를 따지지 않고 믿기 때문에 고등어 대가리마저도 숭배 받는다.’는 일본 속담처럼 이 나라에 가장 이치가 분명해야 할 곳에 미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것에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아무리 거룩한 것도 세월이 지나면 때가 낀다. 이를 ‘거룩한 때’라 우긴다 해도 속수무책 해어져 너덜거릴 것이 분명하다. 근자에 들어 표독스런 신앙에 적잖이 염증이 난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공허한 우리의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새롭게 할 수는 없을까. 쓴물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날이 많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단 말인가. 급기야 교회가 정치 최전방에 나서서 극단을 몰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괴감마저 든다. 이렇게 타락할 수는 없다. 부패정치에 부패종교라니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망가져야 했는가. 참회와 고백이 사라진 뻔뻔스런 시대에 침을 뱉으면 내 얼굴에 떨어질 것이 뻔하다.

이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상고의 정신을 다시 새겨야 하겠다. 눈을 가리는 혹세무민惑世誣民 정치나 종교행위에 속지도 말고 속이지 않는 마음가짐, 즉 모든 것을 타인으로부터 보며 자기 사랑으로 단단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경탄’할 일들이 너무 많다. 반면에 ‘경악’한 일들도 많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인 우리 자신들에게 얼마나 경탄해보았을까.

보는 것부터 달리할 수 있는 눈이라면 세상은 ‘경악’을 ‘경탄’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바깥을 다정하게 볼 수 있는 눈에 대하여 헬렌 켈러는 ‘눈을 잘 쓰는 법’을, 앙드레 지드는 ‘현자는 모든 것을 경탄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듯이 사람을 사람으로 볼 줄 알고 살아가는 흐뭇한 세상은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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