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결하고 명징한 시상…존재의 기억 깨우다 문귀숙 제2시집 ‘사과를 씹는 속도’ 출간
고선주기자 rainidea@gwangnam.co.kr |
| 2026년 02월 04일(수) 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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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귀숙 시인 |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잠들어 있다시피한 기억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의 기억은 낭만적 추억의 성격을 지닌 기억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사는 존재의 내면에 여전한 활성을 가진 기억에 가깝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인의 내면적 추이를 개괄하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현재적 삶의 근저를 살피는 유의미한 연관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시집은 유의미한 연관물들을 한층 더 간결해진 시상으로 전개하는 동시에 명징해진 비유를 시 속에 녹여내고 있다. 애매모호한 의미 대신 선명한 시상을 끌어가고 있다. 분명한 비유들로 인해 시를 읽는 맛이 복잡한 시상에 대한 해석보다는 간명해진 이해를 가져가면 된다는 이야기다.
시 ‘어느날’만 보더라도 실감이 난다. 시인은 ‘덜 기울기와 더 가울기의 반복/곧 무너질듯한 오른쪽 마비를 왼 다리가 후들거리며 끌어간다/물속을 걷듯 헤쳐나가는 걸음나비가 한 발을 넘지 못한다/걸음을 지워버린 몸이 다시 걸음을 익히는 것은 처음 배우는 걸음마보다 더 어려워 고꾸라지고 오래 일어나지 못했다/천변을 달리다 숨이 턱에 걸려 눈을 떴다/숨을 가다듬는 졸음도 꿈도 헛것이다/하릴없는 시간이 무릎 위로 쏟아진다’고 노래한다.
표제처럼 속도라고 하는 시간 개념이 들어가 있다. 기울기는 시간의 흐름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산물의 개념으로 읽힌다. 처음에는 동적인 삶의 주체를 상징한 듯하다. 그러다 동적 특질을 상실하고 난 뒤 정적이 된 후로는 시간의 행방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표출된다. 그것이 ‘시간이 무릎 위로 쏟아진다’는 시인의 시간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삶 역시 속도의 안팎에 존재한다.
시간의 압박은 구체적 형상으로 시적 자아 곁에 놓여진다. 시 ‘사과를 씹는 속도’에서 ‘소리가 옵니다…중략…괜찬다는 주문으로 비명을 외웠던 날 점점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가 심장이 뛰는 소용돌이 속으로 간과 위장과 십이지장을 물고 빨아올립니다…후략…’이라고 읊는다.
현시대의 분주하고 물질만능의 풍조 한 단면을 엿보게 하지만 자연물의 움직임을 통해 사람의 행동을 오버랩시킨데다 심리적 상황까지 세세하게 드러난다.
이번 시집은 ‘여름 해가 숨어버린 한낮’, ‘이 골목은 환하다’, ‘말이 웅얼웅얼’, ‘울음 없는 눈물이 부장되는’ 등 제4부로 구성, 분주한 일상 틈틈이 창작한 시 55편이 실렸다.
고재종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시인의 말은 현존의 진실이다. 모욕적인 말 한마디에 사람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말은 말해지지 않아도 보인다’ 랄지 ‘너만 알고 있어’라는 말들은 이미 말의 내용이 남과 공유되는 것이 전제돼 있다. 부재와 현존, 꿈과 현실, 거짓과 진실, 공유와 비밀을 표현하는 말은 모든 사물과 사건에 어떤 이름이 단정적으로 주어질 때 생긴다. 한데 이름을 이름이라 부르면 더 이상 이름이 아닌 이치를 우리는 안다. 그래서 시인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감각하고자 ‘이름을 모르는 나무들의 숲’으로 가서 자기 스스로도 ‘익명의 여름 나무 한 그루’가 된다”고 밝혔다.
문귀숙 시인은 전남 진도 출생으로 광주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6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돼 등단. 시집 ‘둥근 길’을 펴냈다. ‘둥근 길’은 광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및 아르코 문학나눔에 선정된 바 있다.
고선주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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