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겁 견딘 절의’ 간재 전우, 항일 선비정신 깨웠다

심정섭 명예관장, 제자 유영선에 써준 유묵 공개
민족 정신 집약…을사늑약 저항·후학 양성 상징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2026년 03월 30일(월) 18:28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씨가 30일 간재 전우 선생이 쓴 ‘만겁이 지나도록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일생을 기울여 공자의 제자가 되리라’는 유묵 1점을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이자 항일 유학자인 전우 선생이 일제 강점에 맞서 민족정기 수호에 앞장선 삶과 사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30일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 사백(83·광주 북구)은 간재 전우 선생이 쓴 ‘만겁이 지나도록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일생을 기울여 공자의 제자가 되리라’는 유묵 1점을 공개했다.

이는 가로 24㎝, 세로 41.5㎝ 크기로, 외세의 강압 속에서도 유학의 본질과 민족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간재 선생의 결연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조선 말기 도학자들은 학맥에 따라 기호계열과 영남계열로 나뉘었다. 호남·경기·충청을 중심으로 한 기호계열에는 화서학파, 의당학파, 연재학파, 간재학파, 노사학파 등이 있었다.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영남계열에는 정재학파, 한주학파, 사미헌학파, 성재학파 등이 형성됐다. 이러한 학파들은 단순한 학문 공동체를 넘어 시대적 위기에 대응하는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특히 당시 도학자들은 외세 침략과 국권 침탈에 맞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저항에 나섰다. 의병을 일으켜 무력으로 항거하는 ‘거의소청’,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의를 지키는 ‘치명수지’, 국외로 나가 전통을 보존하는 ‘거지수구’,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는 ‘입산자정’ 등 다양한 선택이 이어졌다.

간재 전우는 ‘거지수구’의 길을 택했다. 현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전통과 학문을 지키며 후학을 길러 민족정신을 이어가겠다는 결정이다. 이번 유묵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간재 선생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항일 의지를 드러낸 지식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두 차례 올렸으며,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자 서신을 보내 뜻을 함께하고 격려했다. 무력 투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학문과 행동은 분명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후 일제의 동화 정책과 강압적 통치가 강화되면서 교육과 학문 활동마저 위축되자, 간재 선생은 1908년 전북 군산 앞바다의 절해고도 왕등도로 들어갔다. 이는 단순한 은거가 아니라 일제의 지배 질서로부터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겠다는 결단이었다.

이듬해 그는 다시 거처를 옮겨 제자들과 함께 서당인 ‘안양서실’을 열었다.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도학자와 유생들이 몰려들었고, 간재 선생은 이들을 직접 가르치며 학문적 전통을 이어갔다. 이후 계화도로 거처를 옮긴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후학 양성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일제 지배하의 육지를 밟지 않는 절의를 지켰다.

1910년 왕등도 거처의 벽에 써붙인 것으로 알려진 ‘만겁이 지나도 한국의 선비’라는 문구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당 유묵은 간재 선생의 제자 유영선(1893~1961)에게 써준 것으로, 작성 시기는 1912년으로 추정된다. 전북 고창 출신인 유영선은 계화도에서 간재 선생을 가까이 모시며 학문을 이어받았고, 1922년 선생의 임종까지 함께한 것으로 전해진다.

간재 전우는 평생 약 3000여명의 제자를 길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인 가운데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도 포함돼 있다. 이는 간재의 학문이 단순한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운동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 그는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소식을 접한 뒤 이를 찬양하는 시를 남기며, 의거의 정당성을 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이는 전통 유학이 근대적 저항 정신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학계에서는 “면암은 싸우고, 연재는 죽고, 간재는 의리를 길렀다”는 평가로 이들의 역할을 구분한다. 무력 투쟁과 순절, 그리고 교육과 사상 계승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의 저항이 모두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정섭 명예관장은 “간재 전우는 한말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공자의 춘추의리를 끝까지 지켜낸 애국지사였다”며 “이번 유묵은 그의 철학과 민족정신이 응축된 사료로,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이어 “동학이나 서학이 아닌 오직 공자의 의리를 따르겠다는 그의 태도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며 “간재의 사상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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