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농협의 다음 65년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정성욱 목포농협 용해지점장
정성욱 gn@gwangnam.co.kr |
| 2026년 05월 03일(일) 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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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욱 목포농협 용해지점장 |
농업은행과 농업협동조합이 1961년 통합되며 출범한 농협은 단순한 조직의 탄생을 넘어선 의미를 지녔다. 생산과 유통, 금융을 하나로 묶은 이 체계는 농민들에게 흩어져 있던 생존의 수단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기반이 됐고, 농촌을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시작된 발걸음은 어느덧 65년의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있다. 2000년 이뤄진 농협·축협·인삼협의 통합은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이해와 영역을 넘어 ‘농업은 하나’라는 인식아래 급변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농민을 지켜내기 위한 절박한 응전이자 결단이었다. 이 통합은 농협이 개별 조직의 연합을 넘어 농업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체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농협의 역사는 끊임없는 통합과 적응의 과정이었으나,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하나의 원칙이 자리해왔다. 농협은 농민이 만든 조직이며, 농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소규모 생산자들이 힘을 모아 시장에서 협상력을 확보하고, 공동 구매와 공동 판매를 통해 삶의 기반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협동조합으로서 농협의 본질이었다.
특히 상호금융은 그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역이었다. 신용이 부족해 금융의 문턱을 넘기 어려웠던 농민들이 서로를 믿고 자금을 나눴고, 그 성과는 다시 공동체로 환원됐다. 여기에 오랜 상호부조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농촌은 단순한 경제 공동체를 넘어 삶을 함께 지탱하는 울타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농협을 성장시키는 동시에 낯선 모습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2012년 단행된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는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농협의 균형을 흔드는 계기가 됐다. 자본과 수익은 금융 부문으로 집중됐고, 경제사업은 점차 경쟁력을 잃어갔다. 과거 금융 수익으로 유통 부문의 손실을 보전하던 구조가 끊어지면서, 농산물을 제값에 판매해야 할 기능마저 버거운 짐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사이 쿠팡, 네이버 등 플랫폼 기업들은 데이터와 물류를 결합해 유통의 판을 근본적으로 바꿨고, 소비자들은 편리한 방식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협의 유통 구조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에 머물러 있다. 하나로마트와 유통센터의 입지는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단순한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구조적 한계의 결과이기도 하다. 농협은 오랫동안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성장해왔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고 경쟁하는 힘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지금까지 농협은 중앙이 방향을 정하고 지역이 따르는 체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초단위로 변화하는 시장의 속도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오히려 각 지역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율성이야말로 미래 경쟁력의 핵심이다. 지역농협이 하나의 독립된 경제 주체로서 유통 전략과 브랜드, 판로를 설계하고, 시장에서 직접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자리 잡는다면 중앙의 역할 또한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을 지휘하는 조직에서 탈피해, 기반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한다. 전국 단위의 물류망과 데이터, 금융 인프라는 중앙이 구축하되, 그 위에서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주체는 지역이 돼야 한다. 중앙은 방향을 강제하는 곳이 아니라, 가능성을 열어주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이 흐름은 브랜드와 유통 방식의 변화로도 이어진다. 하나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묶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이 가진 고유한 가치와 이야기를 담은 브랜드가 스스로 경쟁하며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분산이 아니라 다양성을 통한 경쟁력의 확보다.
금융 역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상호금융의 힘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순환하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지역에서 만들어진 금융의 성과가 다시 그 지역의 농업과 농민, 지역민에게 돌아갈 때 협동조합의 의미는 비로소 완성된다.
물론 이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오랜 시간 형성된 관성과 이해관계를 바꾸는 일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농협을 포기할 수 없다. 농협은 여전히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업인에게 남아 있는 가장 큰 기반이자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농협은 흙에서 시작된 조직이다. 그리고 그 흙은 각기 다른 지역과 삶의 자리 위에 존재한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자가 스스로의 길을 찾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지난 시간을 넘어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하는 길이다. 생존을 위해 태어났던 농협이 이제는 미래를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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