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포장된 4차선 그리고 우리들의 천국

김진구 광주시교육청시민협치진흥원장

김진구 gn@gwangnam.co.kr
2026년 05월 13일(수) 18:01
김진구 광주시교육청시민협치진흥원장
교직의 시작은 국도 27호선 비포장길이었다.

첫 발령 받은 학교가 고흥 반도 끝에 있는 녹동고등학교였다. 남광주 간이역에서 이불 봇짐과 함께 광주여객(현 금호고속)에 올랐다. 고흥읍까지는 그런대로 포장된 길이었다. 고흥읍에서 녹동까지는 굽이굽이 신작로였다. 여관방에 짐을 맡겨 놓고 비봉산 아래 자리잡은 개교 5년째 학교로 걸어갔다. 1학년 3반, 여고생 64명이 담임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창문 너머 바다가 보이는 교단에 서서, 교편을 잡고, 신록예찬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만에 제자도 만날 겸 녹동항을 찾아갔다.

한마디로 얌전했던 경옥, 밝고 맑았던 명숙, 선하고 말없이 조신했던 영숙이 마중 나왔다. 항구의 이별이 아니라 재회(再會)다. 녹동항은 바닷물로 출렁이고, 내 볼은 주르륵 눈물로 젖었다. 어판장을 옮겨놓은 듯 맛난 해물잔치상에 고교 시절 총각선생 뒷담화도 올려 놓으니 엊그제 같은 세월이었다. 보건 의료계, 지역사회 봉사, 목회 활동 등 열심히 살아온 할머니 제자들이다.

한 잔 술로 선창가에 서니 눈앞이 소록도다.

연락선 5분 거리, 저 건너지만 천형의 아픔은 9만리 통한의 머나먼 거리이다. 단절을 위한 공간이었으니 한 번 들어가서 평생을 나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환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파도가 이 작은 사슴섬을 아무리 씻긴들 서린 한을 어찌 지울 수 있겠는가.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가도 가도 황톳길/ 내 발가락이 하나씩 빠지는 길// 해는 자운영(紫雲英) 꽃 속에 날 저물고/ 보리피리 슬피 불며/ 가도가도 황톳길”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의 일부다. 나병이 악화돼 소록도로 가는 길이다. 세상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를 견디며 걸어야 했던 고독한 형벌의 길이다. ‘가도 가도 황톳길’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가기만 하면, 소록도에 닿기만 하면 치유가 되는 신천지가 아니라 기약 없는 막막함의 절규였을 것이다.

시인이 팍팍한 삶을 토해냈던 가도 가도 ‘황톳길’은 이제 매끄러운 4차선 아스팔트로 닦여 있다. 하지만 뿌연 먼짓길에 고단한 시인은 사라졌어도, 그가 겪었을 단절과 소외의 고통은 길가에 핀 찔레꽃 향기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소록도는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기록된다. ‘지배하는 자의 천국은 지배를 받는 자에게는 지옥일 뿐이다’란 제목과 주제를 연결해준 한 문장이다. 오마도 간척 공사 등 나병 환자들에게 낙원을 만들어주려는 지배자의 헌신과 소통 없이 강요된 피지배자의 입장이 충돌한다. 지배자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더라도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도적인 삶이 되지 않는다면 그곳은 당신들의 천국, 당신들의 세상일뿐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 반복되는 파도에도 정박한 화물선은 쉬고 있다. 적재함이 비었는지 고동색 하체를 들어내고 무심하게 맞고 있다. 늘어선 어선들은 나름의 무게로 흔들린다. 이 휴식이 끝나면 대양으로, 어장으로 각각의 길로 떠날 것이다. 가는 길이 어디든 배의 본질은 정박이 아니라 항해에 있으리라. 인생도 고통으로 출렁이든 행복으로 잔잔하든 항해를 멈추면 끝 아닌가.

나는 교직의 긴 항해를 마치고 생의 항구에서 머물고 있다. 돌이켜보니 배는 배움을 찾아가는 학교였고, 교편은 노였다. 교학상장이었기에 학생은 동승자요 동반자였다. 지난 세월만큼이나 많이도 변했다. 배를 타고 가정방문을 갔던 소록도, 거금도(금산)는 거대한 연륙교로 연결돼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맛집과 해풍에 젖고, 녹동항 불꽃축제는 밤바다에 찬란하다. 이제 구불했던 황톳길은 직진의 포장길이 되었으니, 당신들의 천국은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꿨을까. 학생들은 더 평안하고, 교사들은 더 보람 있고, 학교는 더 우뚝한 배움터인가.

녹동항의 파도 소리를 뒤로 하고 차에 올랐다. 마음 한 조각을 제자들 곁에 두고 왔다. 그곳 붉은 흙 속에 묻어두고 왔다. 오는 길에 유명하다는 과역면의 한 국밥집에 들렀다. 세상살이 별 것 있는가, 선지가 혀 위에서 보들야들한 맛의 천국을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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