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보다 귀한 질그릇…흙으로 빚은 도기의 재발견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10월 25일까지 본관서
'주름무늬 병' 등 고대부터 근대까지 306점 출품
청자·백자 너머 도기문화 실용성·미적 가치 조명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2026년 08월 27일(목) 09:30
일상에서 다양하게 활용돼온 도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세영 학예연구사가 전시를 설명하는 모습.
“어찌 금으로 만든 그릇만 보배로 여기랴. 진흙을 잘 구워서 깨끗이 만든 까닭에 변하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며, 넣기도 좋고 부어 마시기도 편리하다.”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이렇게 도기를 일컬었다. 진흙을 빚어 구운 그릇을 향한 찬사나 다름없는 말이다. 화려한 금은 아니어도, 일상에서 쓰임을 다하며 삶을 담아온 그릇.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도기陶器, 우리를 담은 질그릇’은 바로 그 오래된 생활용기의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우리에게 ‘질그릇’으로 익숙한 도기의 실용성과 미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이 지난해 12월 도자문화관을 개관한 가운데 ‘아시아 도자문화 교류 거점’으로 도약하기 위해 추진하는 대표 기획전이다.

전시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인 ‘양온을 새긴 짐승얼굴모양 귀 달린 납작병’을 비롯해 완도 청해진유적에서 출토된 ‘주름무늬 병’ 등 도기 295건 306점이 소개된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우리 도기문화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양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큰 항아리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거칠게 빚은 흙,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질감, 오랜 세월을 견딘 표면의 흔적은 화려한 청자나 백자와는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도기는 사료 속에 화려하게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선조들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음식을 담고, 물과 곡식을 저장하며, 술을 빚고, 물건을 운반하는 데 쓰였다. 특별한 장식품이기 이전에 생활 속 지혜와 미감을 품은 그릇이었다.

전시를 기획한 문세영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시에서는 고대에서 근대를 아우르는 300여 점의 도기를 제작 방식과 쓰임새, 장식의 변화에 따라 4부로 나눠 다채롭게 보여준다”며 “신석기 이후 역사와 함께해 온 도기의 면모를 국립광주박물관이 한자리에 모은 전시”라고 소개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오는 10월 25일까지 특별전 ‘도기陶器, 우리를 담은 질그릇’을 선보인다. 사진은 전시 입구 전경.
전시에서는 고려시대 유물을 직접 만져보며 도기와 자기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태종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전시는 시대별 흐름에 따라 도기의 제작 전통과 형태, 장식기법, 소비 양상, 자기와의 관계까지 폭넓게 다룬다.

제1부 ‘고대국가의 색깔을 담다’에서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도기를 다룬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각 나라의 대표적인 항아리와 오늘날 머그컵을 닮은 잔 등 친숙한 형태의 생활용기를 통해 고대국가 속 도기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1500년 전 사람들이 사용한 그릇들이 오늘의 일상과 아주 멀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2부 ‘장식과 실용을 겸하다’에서는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인화문 도기를 중심으로 당시 생활문화를 살핀다. 삼국통일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유행한 인화문 도기는 다양한 무늬의 도장을 찍고 유약을 입힌 것이 특징이다. 8세기 무렵 전국으로 확산된 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화려한 장식성이 점차 줄고 실용성이 강조되는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제3부 ‘따로 또 같이, 도기×청자’에서는 서남부지역 통일신라 도기 가마터와 도기·청자의 관계를 조명한다. 영암 마산리·구림리, 여수 월하동 월성 등 호남지역 가마터의 지방 도기 생산체계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영암 구림리와 마산리 가마터 출토품은 호남지역이 통일신라 인화문 도기 생산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바닷가에 자리한 영암 가마에서는 그릇이 가마 바닥에 붙는 것을 막기 위해 모래 대신 조개껍데기를 받침으로 사용한 흔적이 확인된다.

이 공간에서는 도기를 본뜬 청자와 청자를 닮은 도기도 함께 비교된다. 도기는 청자로 넘어가기 전 단계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저장과 운반이라는 기능을 담당하면서도 청자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서로 다른 재질의 그릇이 생활 속에서 공존하고 변화해 온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4부 ‘다채로운 일상을 읽다’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 도기의 세계가 펼쳐진다. 강진 삼흥리 가마터 출토품과 태안 마도 해역에서 출수된 물항아리는 관람객이 마치 유물의 현장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로 연출돼 몰입감을 높인다.

전시장에는 조선 태종의 태항아리와 태지석도 마련됐다. 왕실의 태를 보관하는 그릇으로 도기가 쓰였다는 점은 도기가 단순한 생활용기를 넘어 국가 의례와 왕실문화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한다.

아울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지역별 대형 저장용기와 12세기경부터 제작된 회령 도기, 옹기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한 해주 항아리 등도 접할 수 있다.

‘편구병’
‘양온을 새긴 짐승얼굴모양 귀 달린 납작병’
<>이번 전시는 도기를 청자와 백자에 가려진 주변부의 그릇이 아니라, 독자적인 제작 전통과 미감을 지닌 문화유산으로 바라본다. 생활용기였기에 더 널리 쓰였고, 오래 쓰였기에 더 많은 삶의 흔적을 품은 그릇이라는 점을 관람객에게 전한다.

관람객을 위한 체험 요소로는 영상 콘텐츠와 인터랙티브 체험, 나만의 도기를 만들어보는 디지털 공방 ‘도기? 도기!’,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는 ‘도기네컷’ 등이 준비돼 도기를 보다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 기간에는 SNS 인증사진 이벤트와 특별전 소문내기, 도기 퀴즈 등 온·오프라인 행사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최흥선 국립광주박물관 관장은 “도기는 우리네 삶을 담아온 가장 오래된 생활용기다. 일상에서 널리 쓰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도기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미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면서 “이번 특별전이 도기가 들려주는 오래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우리 도기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지난 7월 29일 개막, 오는 10월 25일까지 본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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