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스타트업]홉플로우

수도원 철학을 담은 맥주…‘쉼의 가치’ 빚는다
벨기에 수도원 맥주 전통 현대적으로 재해석
논알코올 음료부터 미식·체험콘텐츠까지 확장
나주의 공간과 사람 잇는 웰니스 관광기업 도전

김은지 기자 eunzy@gwangnam.co.kr
2026년 10월 13일(화) 18:09
나주시 남평면에 위치한 글라렛 수도원 전경
고요한 숲길을 지나 수도원에 들어서면 바쁜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돌아볼 여백이 생긴다. 기도와 묵상, 노동을 통해 마음을 다스려 온 수도원의 시간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쉼의 방식이다.

수도원에서 수행은 단순히 세상과 거리를 두는 일이 아니다. 반복되는 기도와 노동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과 공동체를 돌아보며 삶의 본질을 되새기는 과정이다. 빠른 속도와 효율을 좇는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수도원의 수행은 그런 시간을 통해 쉼의 의미를 일깨운다.

나주시 남평면에서 출발한 홉플로우(대표 곽민재)는 이 공간에 맥주와 미식, 체험을 더해 수도원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술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머물고 교류하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기업이다.

곽민재 대표가 2023년 문을 연 홉플로우는 가톨릭 수도원인 글라렛선교수도회와 협력해 수도원 양조 전통을 바탕으로 한 맥주를 선보이고 있다. 양조 체험과 수도원 투어를 운영하는 한편 논알코올 음료와 관광 프로그램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맥주를 출발점으로 수도원의 역사와 철학, 나주가 지닌 지역 자원을 하나의 경험으로 연결하는 것이 홉플로우의 지향점이다.

홉플로우에서 출시한 논알콜 맥주 ‘루멘 애플 화이트’
곽 대표의 창업은 애초 계획에 없던 길이었다. 전남대에서 지역개발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도시재생과 도시계획, 청년정책 등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지역 활동을 이어왔다. 창업 전에는 대구경북연구원에서 지역 관련 연구를 수행했으며, 유학을 준비하던 중 코로나19를 맞아 진로를 다시 고민하게 됐다.

그 무렵 어려움을 겪던 수도원과 자신의 고민이 맞물렸다. 코로나19로 피정객의 발길이 줄면서 수도원 운영에도 어려움이 생겼고, 마침 수도원 신부가 맥주 키트를 활용해 맥주를 만들고 있었다. 유럽 배낭여행 당시 수도원에서 맥주를 빚어 온 전통을 접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도원의 문제와 자신의 진로를 함께 풀어갈 방법으로 수도원 맥주를 떠올린 것이다.

곽 대표는 한국맥주교육원에서 양조를 배우고 전국의 브루어리를 찾아다니며 사업 모델을 연구했다. 맥주를 좋아해 시작한 사업이라기보다 지역개발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수도원이라는 공간의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다.

그는 “수도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바탕으로 지역과 관련된 콘텐츠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것이 홉플로우의 역할”이라며 “맥주는 그 여정의 첫 단계”라고 설명했다.

홉플로우의 대표 제품은 수도원 양조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맥주 브랜드 ‘루멘’이다. 벨기에식 에일 맥주를 바탕으로 벨지안 화이트와 블론드, 두벨, 다크스트롱 등을 선보인다. 제품 개발 과정에는 글라렛선교수도회 신부가 함께 참여해 시음과 레시피 수정을 거듭했다. 제품 생산은 외부 양조장에 맡기고, 나주 공방에서는 양조 체험과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곽민재 홉플로우 대표.
수도원 맥주는 단순히 종교적 분위기를 앞세운 상품이 아니다.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 맥주는 식량과 음료의 역할을 했으며, 수도자들이 노동과 수행의 과정에서 만들어 온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홉플로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오늘날의 미식 경험으로 이어가고 있다.

곽 대표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만드는 일 역시 수행의 일부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수양하는 과정이었다”며 “된장이나 잼을 만들듯 맥주를 빚는 일에도 노동의 가치와 숭고함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라거 맥주가 청량하고 개운한 맛을 중심으로 즐기는 술이라면, 에일은 효모와 홉, 맥아가 만들어내는 풍미를 음미하는 데 초점을 둔다. 홉플로우가 선보이는 수도원 맥주 역시 제품마다 다른 향과 맛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일부 제품은 병입 후 숙성에 따라 풍미가 달라지는 특성도 지닌다.

브랜드명 루멘은 라틴어로 ‘빛’을 뜻한다. 가톨릭에서 빛은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상징하지만, 종교를 넘어 누구에게나 희망과 깨달음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곽 대표는 맥주를 접하는 이들이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의미까지 함께 느끼길 바랐다.

패키지에도 이런 생각을 반영했다. 수도원과 성당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활용하고, 전용잔에는 성작을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을 적용했다. 차가운 음료를 담으면 색이 변하는 요소를 넣어 마시는 과정 자체에 재미를 더했다. 맥주를 맛으로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발견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경험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홉플로우의 대표 상품인 수제맥주 ‘루멘’
곽 대표가 바라는 것은 수도원 맥주를 일부 애호가만 즐기는 특별한 술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맥주를 취향에 따라 세분해 즐기는 문화가 아직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맥주를 요리처럼 이해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풍미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미식 경험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홉플로우는 맥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도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제품군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산 사과를 활용한 논알코올 음료 ‘루멘 애플 화이트’를 출시했다. 술을 마시고 싶지 않거나 마실 수 없는 사람도 모임과 교류의 자리에 함께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넓힌 것이다.

지역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가능성도 주목하고 있다. 상품성이 떨어져 제값을 받기 어려운 농산물을 가공식품이나 음료의 원료로 활용하면 새로운 소비처를 만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홉플로우는 양조 기술 교육 등을 통해 지역 농업과의 접점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곽 대표가 그리는 사업의 종착점은 맥주 판매 확대만이 아니다. 수도원을 기반으로 미식과 문화, 휴식을 결합한 웰니스 관광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더 큰 목표다. 실제로 홉플로우는 수도원에서 출발해 남평 강변을 달리는 ‘수도원 러닝’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이 달리기를 마친 뒤 논알코올 음료와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자연과 건강, 교류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묶었다.

‘수도원 스테이’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성당 내부의 빛과 음향을 활용한 미디어 테라피.
수도원에 머물며 종교문화와 지역의 이야기를 경험하는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곽 대표가 구상하는 ‘수도원 스테이’는 수도원에서 차를 마시고 식사한 뒤 공방에서 맥주를 시음하며 관련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다. 여기에 성당 내부의 빛과 음향을 활용한 미디어 테라피를 더해 방문객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전남관광재단의 청년 관광 지원사업에도 선정돼 관련 콘텐츠를 구체화하고 있다.

곽 대표는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AI 시대에는 사람 사이의 교류와 커뮤니티가 채우지 못하는 공백이 생길 수 있다”며 “홉플로우가 그 공백을 메우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디저트 분야로의 확장도 구상 중이다. 가톨릭 문화와 연결된 에그타르트와 프레첼 등을 통해 수도원에서의 미식 경험을 다양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다. 향후에는 맥주와 디저트, 체험 프로그램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수도원을 찾을 이유를 더하겠다는 것이다.

수도원과 협력하는 사업인 만큼 운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신뢰다. 일반 기업처럼 속도를 앞세워 사업을 확장하기보다 수도원의 가치와 운영 방식을 이해하고 충분히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곽 대표는 사업 초기에는 계획한 목표를 빠르게 달성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속도보다 관계의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정해진 기간 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속도를 내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성은 시간이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수도원과 충분히 상의하고 천천히 성장하는 과정이 서로의 신뢰를 쌓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곽민재 대표가 홉플로우 맥주 만들기 체험에 참여한 시민들과 함께 직접 수제 맥주를 만들고 있다.
유통망을 무작정 넓히지 않으려는 것도 이런 사업 방향과 맞닿아 있다. 제품이 어디서나 쉽게 소비되는 것보다 사람들이 나주와 수도원을 직접 찾아와 공간과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이 홉플로우만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는 수도원과 브랜드의 방향성에 공감하는 지역의 공간을 중심으로 제품을 선보이며, 방문할 이유를 만드는 지역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홉플로우가 바라보는 성장은 단순히 제품을 많이 팔거나 유통망을 넓히는 데 있지 않다. 수도원의 역사와 지역 자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해 사람들이 나주를 찾고 머물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지역의 활력을 키우는 것이다. 수도원의 고요함과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곽 대표는 “대전에 성심당이 있어 사람들이 빵을 사러 대전을 찾듯, 나주에도 사람들이 찾아올 이유가 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며 “수도원의 철학과 가치를 바탕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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