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 연극 ‘불꽃’, 임진왜란 때 활약한 우리 지역 의병 이야기

-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는 우리 지역 이야기
이창수 시인(광주특별시 남구 민주평화인권과)

이창수 gn@gwangnam.co.kr
2026년 10월 19일(월) 17:25
이창수 시인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남구 원산동에 포충사가 있다. 포충사는 1603년 선조가 내린 사액서원으로 “충신을 기리고 그 뜻을 드높인다”는 의미이다. 사액이란 임금이 내리는 현판을 말한다.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에게 피해만 준다고 전국에 서원 47곳만 남기고 헐어버릴 때 전남에는 장성 필암서원과 포충사만이 살아남았다. 포충사에 배향된 인물은 고경명을 중심으로 그의 두 아들인 종후 인후 그리고 의병장 안영과 유팽로가 있다. 포충사 홍살문 앞 자연석에는 금산과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죽은 고경명의 가노 봉이·귀인의 비석도 눈길을 끈다. 주인에게 의리를 다하고 나라에 충성을 바친 두 가노의 공적을 기려주는 비석은 다른 서원이나 사당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부산성, 동래성이 차례로 떨어지면서 정읍 출신 동래부사 송상현이 왜군의 칼날에 쓰러졌다. 동래성 전투 이후 곧바로 김해와 밀양 경주 대구 상주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며칠 안 가 신립의 군대마저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하였다. 신립의 죽음으로 선조와 대신들은 왜군 침략 20일 만에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의주로 도망쳤다.

임란이 발발하자 의령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 영역은 영남을 벗어나지 못했고 숫자도 적었다. 반면에 호남은 보성 출신 의병장 임계영과 관군인 남원 황진 등이 이끌던 병력은 전쟁 초기부터 영남과 충청은 물론 경기도까지 진출해 왜군과 싸웠다. 이순신과 전라도 수군은 전란 7년 대부분을 경상도 바다에서 왜적과 싸우며 보냈다. 호남은 군량미는 물론 의병과 관군에 참여한 숫자도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임란 초기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가 차례로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 호남에서 삼도근왕군이 일어섰다. 전라도가 5만 충청도가 8000 경상도가 80여 명을 보냈다. 경상도는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6만이 한양으로 진격하다가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히로의 1,600명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싸울 의욕을 잃은 조선에 군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게 고경명이었다.

지난해 무대에 올린 인문학 연극 ‘불꽃’ 공연 모습.
고경명은 김천일 박광옥과 의논해 김천일은 나주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해 김포로 떠나고 고경명은 6800명과 서울로 향했다. 서창 박광옥이 전비를 맡았다. 고경명 부대는 담양에서 출발해 한양으로 진격하다가 일본6군 고바야카와 타다가케가 전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이 있는 금산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전주를 두고 웅치와 이치 금산에서 왜군과 큰 싸움이 벌어졌다. 김제 군수 정담과 황박 등은 웅치에서 광주 군수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은 이치에서 충청도 금산에서는 고경명이 나섰다. 이로부터 한 달 보름 뒤에 벌어진 금산 2차전투에는 조헌과 승병 영규가 나섰다. 이들의 무덤이 700의총이다. 해남 현감 변응정도 이들의 뒤를 따라 일본군과 싸웠다. 이치에서 승리한 권율은 나주 목사로 승진하였고 행주로 가서 싸움을 지휘하였다. 승리 후 도원수가 되었다. 동복 현감 황진은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승전하였다가 1593년 음력 6월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행주대첩이 있기 전 권율의 지휘를 받은 보성 선거이는 4000 병력으로 금천에서 왜군의 길목을 막았고 정유재란 때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와 싸우다 죽었다. 행주대첩에서 큰 역할을 한 화차는 장성 변이중이 만들었다. 전투 중 화살이 떨어지자 화살을 배로 보급한 것도 고흥 정걸이었다. 호남은 임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바다에서 싸웠고 육지에서는 웅치 이치 금산은 물론 멀리 행주산성과 진주성 그리고 경남 고성에서도 싸웠다.

고경명은 임란이 일어난 해인 음력 7월 금산에서 죽었다. 둘째 아들 고종후와 의병장 안영 유팽로도 운명을 함께 하였다. 장남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장례를 치른 1년 뒤 스스로를 복수의병장이라 칭하며 의병 400명과 함께 진주성으로 갔다. 1593년 음력 6월 22일 먼저 와 있던 의병장 김천일 최경회 황진 이종인 등이 일본군과 9일 밤낮으로 싸우다가 전원 순국하였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 이야기는 이때의 일이다. 그녀는 최경회의 후처로 죽은 남편의 복수를 한 것이다.

진주성에는 조선군 3000명과 호남의병은 3600명 등 6600명이 있었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본군은 9만 2700명으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등 최정예 부대가 진주성 2차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의 진주성 싸움은 임진왜란 중 최대 규모였다고 역사는 전한다.

지난해 무대에 올린 인문학 연극 ‘불꽃’ 공연 모습.
명나라 대군을 이끌던 양호와 도원수 권율 그리고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는 일본군의 규모를 보고 감히 싸울 생각을 못하였다. 성안에는 호남의병을 믿고 들어온 경상도 유민이 6만 넘게 있었다. 호남의병은 이들 유민과 함께 왜군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지만 크나큰 전력 차이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죽음으로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냈고 7년 간의 전란을 승리로 이끈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본군도 더는 호남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울산과 사천 순천 바닷가에 성을 쌓고 수성에 들어갔다.

금산에서 죽은 의병 중 하나가 김덕홍이다. 그는 의병장 김덕령의 형이다. 동생 김덕령은 고경명 사후 광해군에 의해 팔도의병장이 되었다. 나중에 ‘이몽학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죽었다. 선조가 직접 국문하였다. 임란 발생 3년 전 기축옥사 때도 선비 1000명이 화를 당했다. 이때 원산동 이발과 그 일가가 죽었다. 이발은 원산동 필문 이선제의 5대 손으로 해남 윤선도의 고모부이기도 했다. 선조는 왜군보다 백성에게 더 모질었다. 임란 3년 전 기축옥사의 원인인 전주 정여립 모반사건이 선조의 조작이라는 말이 있다. 맹자의 ‘천하공물’을 주장한 정여립이 왕권을 부정해서 역모로 몰았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호남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대동단결하여 적과 싸웠다. 광주정신이란 바로 호남의병정신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광주정신은 포충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1월 7일 남구문예회관에서 공연할 연극 ‘불꽃’은 임진왜란 때 금산과 진주성에서 활약한 우리 지역 의병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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