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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경 문학박사·문화기획자 |
이토록 놀라운 성취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것을 가능케 한 ‘기술’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제 그 기술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지금, 사회적 대전환의 시기에 살고 있다.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기술과 문화는 단순히 결합하는 차원을 넘어,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진정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2007년, 광주는 ‘문화기술연구원’이라는 미래지향적 상상을 시작했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라는 비전 아래, 문화와 기술을 융합하는 국가 단위의 기관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은 휘어졌고, 정책은 좌초를 반복했다. 실행의 책임은 흩어졌고, 이상은 점점 희미해졌다.
오늘날 한국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문화 강국이다. ‘기생충’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고, BTS는 단일 공연으로 191개국에서 99만명의 팬을 모았다. 이 모든 성과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기술력, CT(Culture Technology)가 존재했다. 문화기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공연을 실감형으로 만들고, 드라마의 서사를 메타버스로 확장시키며, 창작자와 관객을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감정을 촘촘히 직조하는 알고리즘이자, 감동의 방식을 혁신하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의 구상은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계획에 포함되며 시작되었다. 당시 광주에 이 연구원을 설립하자는 논의는 정치권과 학계의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명박 정부는 국책기관 통폐합을 이유로 계획을 유보했고, 박근혜 정부는 연구소 수준으로 축소시켰다. 문재인 정부조차 예비타당성조사를 제때 추진하지 못하며 실현 의지는 신기루가 되었고, 정책적 약속은 끝내 책임있는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사이 세계는 문화기술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격상시켰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 나라에서는 콘텐츠에 인공지능(AI), 증강현실(XR), 인터랙티브 기술을 결합해 미래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감성을 전달하는 방식조차 기술에 의해 바뀌는 현대사회에서 CT(Culture Technology)는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생존 공식이 되었다.
얼마 전, 민형배 의원(더불어민주당, 광주 광산을)은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의 설립 근거를 마련하는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는 광주의 정치권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은 결실이기도 하다. 정책 토론회를 통해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 계획을 논의하며, 제도와 법적 보완을 통해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의 설립을 위한 첫 번째 물꼬를 튼 셈이다. 그동안 거대한 배를 띄워보지 못한 채, 오랜 시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시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헤아린 의미있는 발걸음이다.
광주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 광주과학기술원(GIST) 등 연구와 산업 인프라가 이미 잘 갖춰져 있어,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 자리 잡기에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와 기술이 융합된 새로운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문화는 기술과 만날 때 진화하고, 기술은 문화를 품을 때 비로소 확장된다. 그 중심축이 될 조직이 바로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다. 이는 콘텐츠 강국으로 나아가는 체계를 마련하고, 문화도시 광주를 미래로 이끌어갈 핵심 엔진이 될 것이다.
정책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실행이 결실로 귀결되는 과정에는 끊임없는 노력과 조정이 필요하다. 작은 실패와 시행착오가 쌓여가면서 비로소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남은 건, 그 오랜 기다림만큼이나 뜨거운 응원과 참여다. 시민과 창작자, 행정과 정치가 함께 손을 맞잡고, 이 꿈의 배가 끝내 희망의 항구에 닿을 수 있도록 끝까지 마음을 모아야 한다.
드디어 새로운 항해를 위한 닻이 올랐다. “깊은 물에 큰 배 뜬다”고 했던가. 오래 기다린 만큼, 이제는 조금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우리 앞에 펼쳐질 새로운 물결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