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권익위원 칼럼]책과 함께 무더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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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권익위원 칼럼]책과 함께 무더위를

박봉순 동신대학교 지역협력본부장

지구가 난리다. 폭염과 폭우가 연일 반복되며 재난 문자가 수십 차례 울려 대니 몸과 마음이 지쳐간다. 하루하루 무탈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시기에 문득 옛 선인들은 여름을 어떻게 지냈을까 궁금해진다. 당시에는 에어컨도 없고, 간단한 부채 하나 구하기도 어려웠을 터다. 선인들은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물가나 정자에서 책과 함께 보내며 여름을 견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과 미디어를 통해 온갖 정보를 즉각 얻는다. 하지만 정보가 지나치게 압축되고 단편적으로 소비되면서 전체 맥락을 놓치고, 왜곡된 지식이 퍼지기도 한다. 옛말에 ‘귀한 자식은 여행을 보내라’고 했다. 직접 체험하고 느끼며 배우는 여행이 인생의 밑거름이 되고 귀한 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여행이 어려울 때는 책을 가까이하며 직접 경험하지 못한 지혜와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 ‘책 속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진리다.

현대의 여름은 피서와 휴식의 계절이지만, 정신을 위한 ‘냉수욕’ 또한 절실한 시대다. 지식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길이다. 이기심이 능력으로 포장되고 소음이 일상이 된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삶의 중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깊은 사고, 곧 ‘고전 독서’에 있다. 빠르게 소비되는 정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어떤 태도를 남기고 있는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듣고 오래 생각하는 능력이 지금 이 시대의 가장 귀한 자산이다.

한국의 전통 지성은 책을 가까이하며 인간의 수양과 사회적 실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특히 여름은 단순한 무더위 시기가 아니라 정신을 단련하고 내면을 정제하는 계절이었다. 옛 선비들은 책을 통해 자신들의 품격을 드러냈고, 무더운 여름을 내면의 수양과 함께 견뎠다.

조선의 여름은 달랐다. 선비들에게 여름은 수양과 공부, 사색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였다. 퇴계 이황은 무더운 여름에도 ‘논어’를 소리 내어 읽었고, 다산 정약용은 강진의 뜨거운 여름 속에서 ‘경세유표’ 같은 대작을 완성했다. 율곡 이이는 열여섯 살 여름, ‘주역’을 탐구하며 존재와 질서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의 통찰은 조선의 교육 철학과 정치 구조의 근간이 됐다. 그들에게 여름은 피할 계절이 아닌, 자신을 단련하고 세상을 관통하는 사유의 시간이었다. 고요히 책장을 넘기며 한 구절에 몰입하는 모습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오늘날 독서는 ‘정보 습득’이나 ‘자기계발’로 오해받는다. 하지만 진정한 독서, 특히 고전 독서는 존재를 단련하는 내면의 실천이다. 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오늘도 나를 익히고 있는가?’, ‘나는 지식을 위해 배우는가, 아니면 인간이 되기 위해 배우는가?’ 고전의 문장은 느리고 깊으며 고요하지만 날카로운 울림을 지녔다. 그 울림은 인공지능도 알고리즘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의 자산이다.

독서를 통해 미래를 빚는 한국인, 속도에 중독된 현대 사회는 정보가 넘치지만 이해는 얕고, 연결은 많지만 공감은 희미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멈춤과 사고, 즉 정신의 회복력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깊이 있는 독서이며, 사고의 근육을 다시 기르는 일이다. 독서는 개인의 품격을 빚고 세대 간 지적 공기를 맑게 하며 국가의 문화적 깊이와 미래 역량을 결정짓는다. 책을 읽는 인간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사회 기반이다.

책은 쉼표이자 출발선이다. 여름은 쉰다. 그러나 진정한 쉼은 멈춤이 아니라 내면의 전환이어야 한다. 책을 펼친다는 것은 외부 자극을 끊고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정신의 냉수욕이다. 독서는 정신의 평온을 회복하는 길이며, 정보 소비자에서 실천자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정신적 근육이 말라가는 중이다. 경제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의 허기는 깊어지고 있다. 한국인의 정신에는 지혜와 절제,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미학이 살아 있다. 책은 얼음물보다 더 깊은 청량감을 준다. 책은 쉼이며 전진이고, 사고이자 구조이며, 무너진 내면을 다시 빚는 정신의 공방이다.

독서를 하자. 이 여름, 나를 다시 빚고 무더위를 슬기롭게 넘기기 위해, 그것이 현재의 세상을 품격 있게 살아가고 미래를 정신적 공허함 없이 맞이하는 가장 단단하고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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