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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희 광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팀장·광주자원순환협의체 사무국장 |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만 해도 종이팩 전용 수거함이 없다. 분리배출장에 가보면 폐지와 종이박스가 뒤엉켜 있는 종이류 수거함 속에 종이팩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종이처럼 보이지만, 종이팩은 내부에 얇은 플라스틱 비닐이 코팅돼 있어 일반 종이와는 전혀 다른 공정을 거쳐야 재활용된다. 그래서 플라스틱과 종이를 구분하듯, 종이팩 역시 별도의 수거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있는 종이팩들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
2023년 환경재단이 SSG닷컴, 테라사이클과 함께 실시한 ‘종이류와 종이팩류 구분과 분리배출 방법’ 시민 설문조사에 따르면 종이류와 종이팩류를 정확히 구분해 답한 시민은 응답자의 2%에 불과했다. 인식과 실천 사이에 여전히 큰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우리 집에서 일주일 동안 발생하는 종이팩은 900㎖ 기준 1~2개 정도다. 자원순환 교육을 받은 덕분에 내용물을 비우고 헹군 뒤 펼쳐서 말려 모아두지만, 일정량이 쌓일 때까지 집 안에 두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동네 행정복지센터에 가져가면 화장지로 교환해 준다고 하지만, 운영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 직장인 입장에서는 사실상 이용하기 어렵다. 제도는 있지만 생활과 맞닿아 있지 않은 셈이다.
사실 아파트 단지에 종이팩 수거함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설치됐다가 관리상의 어려움으로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헹구지 않은 종이팩이 하루만 방치돼도 금세 부패하고 악취를 유발하기 때문에 종이팩 수거함 설치는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근 계림두산위브에서 진행된 ‘공동주택 종이팩 별도 배출을 위한 자원순환 리빙랩’은 작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마을공동체가 제안해 공동주택에 종이팩 수거함을 설치하고 주민 인식 개선을 위한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주민들은 수거함을 설치하고, 아파트 출입구 게시판, 수거함 앞에 분리배출 안내문을 부착하고, 주 1회 안내 방송으로 참여를 독려했다. 실험 초기에는 컵라면 용기, 일반 종이, 음식물 쓰레기까지 뒤섞여 있었고, 씻지 않은 종이팩도 다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대부분의 주민이 올바른 방법으로 배출하기 시작했고, 헹구지 않은 종이팩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 제도적 장치와 안내가 뒷받침된다면 시민이 적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시 공모사업 절차에 따라 3~4월에 계획과 심사가 진행되고, 실천가들의 학습과 수거함을 설치하고 나니 실제 입주민들의 참여는 6월 무더위 속에서 시작됐다. 하루만 방치해도 부패가 심각해 실천가들은 한 달 내내 매일 수거함을 점검해야 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수거 체계였다. 아파트와 계약된 재활용 업체는 그동안 종이팩을 따로 모으지 않아 별도 계약을 하지 않고 ‘파지’로 분류해 수거했다. 아무리 깨끗하게 모은다고 해도 공동주택 한 곳에서 나오는 종이팩 양은 극소량이므로 주민들이 애써 모은 종이팩이 깨끗한 상태로 최종 재활용 단계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인근 자원순환가게와 협력해 별도 수거를 하며 데이터를 확보했다. 향후 다른 공동주택으로 확산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처럼 종이팩이 쓰레기로 사라지지 않고 고품질 자원으로 되살아나려면 제도적 뒷받침과 현장 관리가 동시에 필요하다. 특히 재활용 쓰레기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공동주택에는 종이팩 전용 수거함 설치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지금처럼 수거와 선별의 상당 부분이 민간업체에만 맡겨진다면 종이팩 재활용률은 13.2%에서 더 떨어질 수도 있다. 예산과 수익 구조, 작업 환경 등 제약이 큰 민간업체만으로는 안정적인 자원순환 체계를 구축하기 어렵다. 공공 영역이 적극 개입해 제도를 보완하고 현장을 지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과정을 통해 성숙한 시민의식과 실천의 중요성이 확인됐다. 수거함 설치 후 정착되기까지는 세심한 관리와 주민 참여가 필요하다. 악취와 부패를 막기 위해 현장을 꼼꼼히 살피고, 주민과 소통하며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력 지원 또한 뒤따라야 한다.
종이팩은 종이가 아니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뒷받침과 시민의 실천, 그리고 현장 관리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그럴 때 종이팩은 쓰레기가 아닌 자원으로 당당히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