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즐겁고 행복한 노후를 위한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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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즐겁고 행복한 노후를 위한 프로그램

강경호 시와사람 발행인 겸 주간

강경호 시와사람 발행인 겸 주간
오늘날 ‘백세시대’라는 말처럼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 은퇴 후 노후생활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은퇴해 20~30년을 무료하게 보내는 일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생을 나라와 가정을 위해 헌신한 어르신들에게 다행스럽고 마땅하다.

그러나 농촌지역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문화적 혜택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간혹 문화원에 실버세대를 위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역은 다행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인구밀도가 높아 언제든지 접근하기가 쉽지만 농촌지역의 경우 각 면소에서 읍내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4년째 함평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어르신문화학교에 나가 어르신들에게 ‘고향스토리텔러’를 지도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3시간을 어르신들과 함께 논다는 마음으로 광주에서 함평까지 가는 일이 즐겁다. 고향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자신의 삶을 기억해 말로 풀어내고 글로 기록하도록 한다. 물론 어르신들 대부분이 글 쓰는데 훈련이 안 되어 있어 세련된 문장을 쓰기 힘들다. 필자가 거들어 함께 고향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은 어르신들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멋진 문장을 뽐낼 일도 아니다. 자신의 고장에서 전해오는 역사나 설화를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붙여 이야기해 보거나 일제 강점기의 민족 수난, 참담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배고팠던 보릿고개와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해 바친 땀방울의 이야기, 개인적인 슬픔과 기쁨의 이야기 등을 생각하며 자신의 고장과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어르신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참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거나 ‘나의 일생은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움추렸던 어깨를 펴게 될 것을 기대한다.

한국전쟁 전 3.8선 이북에서 살았던 어느 어르신의 기록을 통해 전쟁준비를 하고,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신 어르신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해방공간에 갓 결혼한 새댁의 남편이 좌익으로 몰려 목포형무소에 수감됐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면회를 가지 못하다가 가족들 모르게 면회갔지만 며칠 전 목포 앞바다에 수장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젊은 시절의 어느 할머니의 가슴아픈 사연은 모든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부모님이 해방이 돼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 역시 듣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한다. 누대로 물려받은 가난을 청산하겠다고 70년대 열심히 일해 온 새마을지도자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파란만장한 가시밭길을 지나온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모습은 젊은이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의 상징으로 비춰진다. 어린 학생들처럼 숙제를 잘 해 오지 않는 은발의 학생들도 있지만 요즘은 다음 달 시화전을 위해 열심히 시를 써서 젊은 선생에게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제출하는 소녀 같은 할머니도 계신다.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7월이지만 우리 어르신들은 함평엑스포공원 소나무밭에서 오색으로 펄럭이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적힌 시화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행복해 한다. 가을이 다가도록 책상에 앉아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기도 하고, 가끔 꾸벅꾸벅 졸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학교에 간 듯 열심히 공부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10월이면 모든 프로그램이 마무리된다. 어르신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쓴 글들은 수백 편이 된다. 그것들을 기록한 책을 읽는 어르신들은 삶의 활기를 찾는다. 명절 때 집에 오는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할아버지가, 또는 할머니가 글을 썼다고 이름 석 자가 박힌 글을 펼쳐보이곤 한다고 한다. 평생 자신의 이름 석 자 내세울 일이 없었던 어르신들이라 힘들기도 했던 교육과정이었지만 내년에도 다시 문화원에서 모이자 한다.

어느 지방문화원의 소박한 프로그램이지만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살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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