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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오랫동안 우리는 백석의 시를 접할 수 없었다. 백석은 해방공간에서 월북한 것도 아니고, 전쟁 기간 중 납북된 것도 아니고 자기 고향인 북쪽에서 월남하지 않고 다만 그냥 머물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시집 ‘사슴’이 불온서적이 되고, ‘모닥불’과 같은 시를 읽으면 빨갱이로 몰리는 시절이 있었다.
지난 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그 실체적 증거와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몇몇 위정자들이 우리 문화의 수준을 일거에 1970~1980년대로 후퇴시킨 참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다소라도 문화적 소양이 있는 관계 공무원들의 반발을 무시하거나 제압하고, 끝까지 거짓말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뻔뻔함으로 일관했다. 문화계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넘어서 분노로 들끓었다. 자칫 ‘모닥불’을 ‘사슴’을 다시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함께 했다.
‘모닥불’은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1936년 시집 ‘사슴’에 처음 발표돼 지금 우리의 감각으로 다소 어려운 어휘들이 있다. 1연의 ‘새끼오리’는 새끼줄, ‘갓신창’은 가죽으로 만든 신의 밑창, ‘개니빠디’는 개의 이빨, ‘너울쪽’은 널빤지쪽, ‘짚검불’은 지푸라기, ‘닭의?’은 닭의 깃털, ‘개터럭’은 개의 털이다. 2연의 ‘재당’은 향촌 또는 한 집안의 최고 어른에 대한 존칭, ‘초시’는 과거의 첫 시험에 급제한 사람, 또는 한문을 좀 아는 유식한 양반을 높여 이르는 말, ‘문장’은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갖사둔’은 새사돈이다. 3연의 ‘불상하니도’는 ‘불쌍하니도’의 고어이며, ‘몽둥발이’는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것이다.
해금 이후에도 백석의 시편들은 시어가 난해해 일반 독자의 감상은 물론 전문 연구자들의 접근도 쉽지 않았다. 이후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숭원 편 ‘원본 백석 시집’(깊은샘, 2006)과 고형진 편 ‘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 2007)을 통해 이제는 누구라도 쉽게 백석의 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최근 이경수는 많은 연구자들과 함께 ‘다시 읽는 백석 시’(깊은샘, 2014)에서 그동안 진행된 백석의 시와 시어에 대한 논의를 꼼꼼하게 정리했다. 한편 고형진은 백석 시어 분류사전인 ‘백석 시의 물명고’(고려대출판부, 2015)에서 백석 시어 전체를 의미별로 분류, 재구성했을 뿐 아니라, 지도와 그림까지 동원해 시어에 깔려 있는 박물학적 문학관을 완성했다. 이제 백석의 시편들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시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 됐다. 백석의 시에 대해 연구자들이 기울인 노고 또한 우리 시대의 빛나는 문화적·학문적 업적이다.
‘모닥불’은 짧지만 읽을수록 아름다운 작품이다. 쓰잘데기 없는 잡동사니들을 모아 태우고 시답지 않은 사람들을 모닥불 주변에 둘러세워 따뜻하고 황홀한 장면을 연출해내고 있다. 명사의 나열만으로 그리고 그 나열의 개방성으로 높낮이 없이 함께 어우러져 무심한듯하면서도 질서를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따뜻한 동심원이 펼쳐진다.
2016∼2017 촛불은 ‘모닥불’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땅의 모든 갑남을녀 장삼이사들이 평등하였고 나란하였다. 분노, 아픔, 수치 모든 부정적인 마음들을 가득 안고 나왔으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위정자들의 행패에 경악하고 분노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위대해지는 길을 택했다. 우리 시대의 빛나는 문화적·사회적·정치적·역사적 업적이다.
2026.03.05 (목) 02: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