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지원금으로 시(詩)를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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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민생지원금으로 시(詩)를 살 수 있다면

백승현 대동문화 전문위원

백승현 대동문화 전문위원
[문화산책]벌써부터 민생회복 지원금을 우리 가게에서 쓸 수 있다는 안내문이 내걸려 있다. 옷, 이불 가게, 편의점, 커피숍, 식당, 미용실, 치킨집, 빵집…. 그보다 더 많은 가게들엔 ‘임대 문의’라는 부동산 중개 사무소의 안내문이 붙어있다. 민생지원금의 혜택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많던 가게와 주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민생’이란 ‘일반 국민의 생활 및 생계’이고 ‘생계’란 ‘살아갈 방도나 형편’을 말한다. ‘생계’라는 말에서 땀내와 열기가 느껴지고,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과 야위고 주름진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민생회복 지원금을 예술인들에게 지급할 수 있다면 어떨까? 쌀을 사듯이 시인에게 시를 사고, 화가에게 그림을 사고 민생지원금을 결제한다. 그러면 예술가들의 생계가 조금 나아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새로운 정부는 예술활동 증명을 완료한 모든 예술인에게 ‘기본소득’ 개념의 연 100만원의 창작지원금을 지원하기로 했고, 고용보험과 실업급여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법 시행령을 개정하고 있다.

예술과 생계를 생각할 때 고등학생 시절 단체로 봤던 영화 ‘서편제’의 대사가 떠오른다. 영화 속 유봉 일가는 정처 없이 떠돌며 소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소리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 되어 버렸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날들이 많아진다. 아들 동호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만 고집하는 아버지의 삶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다. 아버지 유봉은 판소리의 ‘득음’이라는 예술적 경지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하는 예술지상주의자다.

어머니가 죽어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는 동호와 송화 앞에서, 아버지 유봉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북을 치며 송화에게 소리를 하라고 다그친다. 아버지의 비정한 모습에 동호는 경악하고 분노한다.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이젠 더는 못 참겠소!”라고 말하고 “우리 이제 뭘 먹고 살아요!”라고 절규한다.

“우리 이제 뭘 먹고 살아요!”라는 대사는 예술과 현실이 부딪혔을 때의 예술관의 충돌에 다름 아니다. 예술이나 생계냐?

알랭 드 보통은 ‘영혼의 미술관’이라는 책에서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나서 대답하기를 예술은 가치의 기억, 희망, 슬픔의 승화, 일상의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자기 성장의 동력, 감상을 통한 동화라는 기능 때문에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정서적 감정적 균형을 회복해 가고 우리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용기를 얻게 된다. 예술은 균형과 선함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창작자들은 어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귀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또 자본주의라는 세계 위에 발을 딛고 사는 한 명의 생활인이다. 예술가들은 정신주의와 물질주의라는 프레스에 낀 노동자와 같다. 생계라는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예술가의 생애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예술가’라는 낭만주의 신화가 우리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다. 낭만주의 신화에서 예술은 돈을 죄악시하거나 비도덕적으로 여긴다. 예술가가 돈을 이야기하면 속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 예술혼을 팔았다고 수군댄다.

자본주의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상품’이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가치는 공산품처럼 제작비와 마진이 매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불명확하다. 예술가는 자신의 노력과 작품의 예술적 성취가 시장 가격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이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분열하게 된다.

예술을 하면서 ‘돈을 생각하는 나는 순수하지 못하다’는 내면의 도덕적 갈등과 ‘예술을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라는 현실적 고통은 창작자의 삶을 갉아먹고 영혼까지도 탈진시킨다.

김수영 시인은 ‘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돈의 힘은 나의 힘보다 세다/아아 나는 돈의 힘을 안다/돈의 더러운 힘을 안다/돈의 비린내 나는 활력을 안다’ 시인은 돈이 명예나 사랑보다 강하다고 절규하면서도, 그것을 ‘더러운 힘’이자 동시에 ‘비린내 나는 활력’이라고 부른다.

돈은 우리를 타락시키고 속박하는 더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움직이고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초적인 에너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밖에서 살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술을 감상함으로써 우리의 천성을 지킬 수 있다. 예술 감상이 우리를 구원하고 치유한다.

예술 창작자들은 ‘돈은 예술의 적’이라는 낡은 신화를 폐기해야 한다. 돈은 예술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예술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생활의 안정이 창작의 자유를 보장한다. 자본주의를 활용해 내 예술 세계를 지키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전략적 사유’가 필요하다. 여기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따뜻한 보살핌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돈이냐 예술이냐? 이 둘은 서로 더 좋고, 현명하고, 정직한 관계를 형성할 수는 없는가? 우리는 지금 그런 오래되고 해묵은 고뇌를 지금도 하고 있다. “우리 뭘 먹고 살아요?” 예술가들은 늘 이 고뇌에 찬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더러운 힘이고 비린내 나는 활력이라도 순결한 영혼의 예술가들은 예술로 충분히 먹고사는 생계를 지금도 꿈꾼다. 시인과 화가들이 불황 때문에 폐업을 해서야 되겠는가?
김다경 기자 alsqlsdl94@gwangnam.co.kr         김다경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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