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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나루 문학평론가 |
영화 속 인물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범주로는 쉽게 묶이지 않는다. 혈연이 아닌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살고, 헤어졌던 관계가 다른 이름으로 이어지고, 설명하기 어려운 인연들이 결국 하나의 삶으로 포개진다. 그런데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가족을 가족답게 만드는 요소는 혈연에 매개한 가계도의 정합성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고단함을 받아내고, 다투다가도 다시 같은 식탁으로 돌아오는 경험의 누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20년 전 영화 ‘가족의 탄생’을 지금 다시 회상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이제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이 아니라 ‘한국인’을 재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너무 쉽게 ‘한민족’이라고 답한다. 그 말이 지닌 역사적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를 우리로써 지켜주던 과거의 울타리가 오늘날 우리를 일부로 구분짓고 차별하는 창살문으로 사용되려 하는 세태는 참 곤혹스럽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를 삶의 자리로 삼아 살아가는 낯선 사람들이 많다. 귀화한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로 생각하고 자란 아이들도 있다. 학교 교실, 편의점, 병원, 집 근처 식당, 심지어 내무반에서 우리는 이미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이름과 피부색, 부모의 출신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같은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을 반복해서 듣는다. 질문자들은 가벼운 호기심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질문을 받는 이들에게는 소속을 의심하는 차별의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다문화시대에 필요한 것은 혈통을 따져서 언제부터 이 땅에 살았는지를 검증하려는 대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일 뿐임을 인지하는 태도이다. 다문화시대의 새로운 기준은 배제를 위한 검증법이 아니라 공존을 향한 상식이어야 한다.
‘가족의 탄생’에서는 ‘정상가족’이라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검증하지 않고, 정상이라는 말이 놓쳐 버리는 사연 많고 흠 많은 사람들이 엉성하게 부딪치면서도 끝내 한집의 시간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가족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임을 말한다. ‘가족’이 그러하듯, ‘한국인’은 혈연에 의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함께 살며 서로의 삶을 떠받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과거를 설명하는 역사적 언어이고, 한반도 밖에서 이 땅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묶는 매개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인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상이 같다고 저절로 공동체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피를 나누지 않았다고 끝내 외지인으로 남는 것도 아니다.
이주민이 한국인이 되는 사례가 최근에서야 대두되는 것도 아니다. 태조 이성계의 의형제로 유명한 이지란은 본래 여진족이었고, 백정 혹은 화척이라고 불리던 계층 또한 귀화한 유목민족이었다. 그런가하면 베트남에서 온 왕족의 후예도 있고 신라사에서도 여럿 이주민으로 추측되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즉, 과거에도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준은 피보다는 함께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함께 배우고, 일하고, 아프고, 돌보고, 싸우고, 화해하며 쌓아 온 시간 말이다. 다문화시대에는 누구의 피가 더 안쪽에 있는지를 묻는 사회가 아니라, 누가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사회. 한국이라는 이름은 그 질문에 더 성실할 때 비로소 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강나루 gn@gwangnam.co.kr
강나루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05.07 (목) 1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