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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나루 편집장 |
얼마 전, 집 근처 골목길을 산책하던 중 작은 카페 유리문에 붙은 흰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검은 매직으로 “커피 찌꺼기 공짜로 가져가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평범한 안내문이었지만, ‘찌꺼기’와 ‘공짜’라는 단어가 주는 온도 차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찌꺼기’라는 표현은 쓸모를 다한 쓰레기처럼 다가왔다. 여기에 ‘공짜’라는 단어가 더해지자, 나눔이라는 의미는 옅어지고 시혜나 적선의 느낌이 앞섰다.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 몇 개가 물건의 성격을 바꾸고, 독자의 감각을 전환시켰다. 나는 그 작은 안내문에서 표현의 온도를 다시금 체감했다.
이 경험이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비슷한 감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말실수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종종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라며 변명하고자 곤란한 상황에서 자주 내뱉는 말에서 느낀 것이었다. 그 말은 언뜻 무해한 듯 들리지만, 사실은 “‘나’는 의미를 두지 않은 말인데 ‘너’는 어째서 의미를 두고 ‘내’게 화를 내느냐”는 책임 회피와 전가의 시도이기 때문에 참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언어에는 힘이 있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고 해서 무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작용한다. 말은 엎어진 물처럼 주워 담을 수 없고, 그 반응은 예측하기 어렵다. 가벼운 농담이 예상치 못한 상처로 다가와 오래도록 남을 수 있고, 무심한 말 한마디가 오랜 관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말의 반작용은 화자와 청자 사이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으로 퍼져나가 더 큰 파장을 만들기도 한다. 언어가 지닌 파괴력은 그래서 두렵고, 또한 무겁다.
세대 갈등의 장면에서도 언어의 무게가 드러난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말을 상처라 하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말투를 무례하다 한다. 서로가 상대의 언어를 문제 삼지만, 사실 어느 한쪽만 잘못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감각을 기준으로 삼는다. 늘 강한 자극의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덜 매운 음식은 하나도 맵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맵냐”는 질문에 “전혀 맵지 않다”고 대답한다. 이처럼 우리는 언어의 세기를 각자의 경험과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 결과 오해와 갈등이 발생한다.
나는 주로 한두 세대 위의 사람들과 함께할 기회가 많다. 그들과의 자리에서 늘 같은 감각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어린 후배로 여기고 툭툭 말을 던지지만, 또 어떤 이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 가운데에는 존경할 만한 인격자가 있다. 내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누구든 대화 상대로 존중하며 신중한 언어로 품격을 보여서다. 언어를 통해 상대와 자신을 함께 높이는 품격을 보였다. 나는 이들에게서 인격과 태도가 언어에서 드러남을 깨달았다. 언어는 곧 그 사람의 무게이자 품격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 역시 그런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고등학생쯤에 읽은 신문 사설에서 우리 사회의 언어 문제가 압축성장의 부작용이라며 전통적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의 삶은 여유를 잃고, 그 결과 언어 또한 거칠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압축성장의 시대를 한참 지났고, 21세기도 4분의 1이나 흘렀음에도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언어의 문제를 압축성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언어가 무너지는 데는 세대 단절과 사회 구조, 생활 습관의 변화 등을 꼽는다. 어느 하나로만 단정할 수 없고, 여러 조건이 서로 얽혀 언어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 우리가 관찰하는 사회의 균열과 불안정은 언어와 깊이 관련이 있다. 무심히 던져진 말, 상대를 아랫사람으로 여기며 적선하듯 하는 표현, 쓰레기처럼 치부된 단어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벌린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결속력이다. 언어가 조심스럽게 쓰일 때 사회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질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언어가 무심하게 흩뿌려질 때 사회는 금세 상처 입고 불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
카페 문 앞에서 본 그 안내문은 흰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문구는 언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언어는 찌꺼기가 아니며, 공짜처럼 아무렇게나 던져질 수도 없는 것이다. 언어는 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언어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지 결정한다. 우리는 말하는 순간마다 사회의 윤곽을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말은 사소해 보이지만 언제나 무게가 있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시절, 동네를 뛰놀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 곁을 지나치면서 인사를 하면, 할머니들은 인사는 멈춰서 하고 가야 한다고 일러주곤 했다. ‘언어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함께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는 그 가르침은 지금껏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제는 신문 사설에서 주장하던 ‘전통적 가치’를 간직한 목소리를 들려주던 할머니들이 사라진 시대가 된 것 같아 아쉽다.
2025.10.29 (수) 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