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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진희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팀장 |
2년 전 방문했던 필리핀의 국제쌀연구소(IRRI)가 떠오른다. 이곳은 과거 한국 연구진과 협력해 ‘통일벼’를 개발하며 식량 자급의 기반을 마련한 뜻깊은 장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종자은행에는 13만여점의 벼 종자가 보관돼 있었다. 다양한 씨앗을 보관할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싹을 틔워 새 씨앗을 받아내고, 품종 개발이 필요한 전 세계 연구기관에 무료로 나누는 따뜻한 순환이 이뤄지고 있었다. 기후변화에 맞춰 가뭄과 홍수를 견디는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는 식량안보의 막중함에 비해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당장 밥상이 풍족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 안일하게 여겨온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게 됐다.
이 값진 경험은 올해 농사를 직접 배워보고자 ‘토종학교’에 다니면서 다시금 선명해졌다. 토종학교에서는 절기를 배우고, 흙에 직접 씨앗을 심고, 잡초를 매며, 가을에 거둔 결실로 다 함께 밥상을 차려 먹는다. 그리고 내년 농사를 위해 다시 씨앗을 받아둔다. 씨앗이 밥상이 되고, 그 밥상이 다시 씨앗으로 이어지는 경이로운 순환의 고리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과정이다.
일주일 사이에 찾아가 본 밭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작고 까만 씨앗이 파란 싹을 틔우는가 하면, 어느새 잡초가 작물보다 무성하게 자라나기도 했다. 땅에 심어두기만 한다고 작물이 스스로 자라주는 법은 없었다. 비가 내린 뒤에는 땅을 다져 고르고, 모종이 제대로 자라나는지 제때 맞춰 정성껏 돌봐야 한다. 단 한 번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숱하게 밭을 오가는 농민의 노력을 직접 치러보면서, 비로소 밥상 위에 올려진 먹거리 하나하나에 담긴 노고와 무게를 가슴 깊이 알게 됐다.
직접 수확한 농작물로 차려낸 밥상 앞에서는 음식 이야기가 자연스레 농사 이야기로 흐른다. 단지 무엇을 먹는지에 대한 일차적 소비를 넘어, 이 식재료를 누가 어떤 마음으로 키워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흙을 만져본 작은 경험은 농업을 향한 따뜻한 관심으로 이어지며, 지역 농산물을 꾸준히 소비하고 농촌이 직면한 어려움에 함께 귀 기울이게 만든다. 농촌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결국 내 밥상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깨닫는 것이다.
광주와 전남의 교류와 상생 역시 이러한 농업과 먹거리를 매개로 더욱 넓어져야 한다. 광주에 거주하는 내가 전남의 밭에서 농사를 배우고 밥을 나누며 연을 맺었듯, 도시와 농촌 주민이 일상에서 서로의 삶을 깊이 알아가는 관계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행정 구역 통합에만 그치지 않고 일상 속에서 온기를 나누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시급하다.
농사 교육과 도농 교류 프로그램,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직거래 장터가 꾸준히 이어지길 기대한다. 봄에는 함께 씨앗을 심고, 가을에는 수확물로 밥상을 차려 온정을 나누는 지속가능한 도농 상생이 일상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행정적·재정적 지원의 확대와 더불어, 현장에서 터져 나온 경험과 목소리를 실질적인 농업 정책에 적극 담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후위기 속 식량안보는 결코 거창하거나 아득한 담론이 아니다. 내년에도 이 땅에 무사히 씨앗을 심을 수 있는지, 지역의 농업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해 우리 모두가 오늘 하루 안심하고 따뜻한 밥상을 맞이할 수 있는지에 관한 삶의 문제다. 농업을 단순한 1차 산업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단단히 지탱해 주는 삶의 뿌리로 바라보아야 한다.
함께 심고, 나눠 먹고, 다시 씨앗을 받는 작은 경험은 밥상의 소중함을 배우는 교실이자 서로의 삶을 품어주는 과정이다. 이 작은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일 때 농촌을 향한 온정도 깊어지고, 광주와 전남이 나아갈 참된 소통과 화합의 길도 비로소 환하게 열릴 것이다.
오진희 gn@gwangnam.co.kr 오진희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10.22 (목) 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