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여름의 시간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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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세평]여름의 시간에 기대어

김명화 교육학박사

김명화 교육학박사
어릴 적 장맛비의 추억은 감자를 먹는다거나 부침개를 부쳐 모든 가족이 마루에 걸터앉아 먹었던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지금의 비는 한 번씩 내리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돼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기다 거실을 두리번거렸더니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박준 시인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엊그제 내린 비로 도시가 침수되는 상황이 되는 여름날에 시집의 문구는 고개를 가웃거리게 한다.

여름 무더위에 시간을 얻어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 이가 소식을 전해 왔다. “머리가 뚜껑이 벗겨질 것 같은 더위야”라는 이야기에 웃음 밖에 답이 줄 수 없었다.

이 지구상에 시원한 나라도 많은데 하필이면 더운 나라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그냥 무작정 떠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여름의 시간에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을 준비하는 자가 부러운 시간이다.

필자도 여름의 시간에 더위를 피해 무주로 여름 사냥을 떠났다.

산에 걸쳐 있는 뭉게구름에는 산신령님이 나타날 것만 같은 신비한 날이었다.

무주에 있는 버드나무가 아름드리 있는 마을 카페를 찾았다. 무주 설천 깊은 산골에 노년의 부부가 된장국과 산에서 캐온 나물로 된 밥상을 차려줄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나이든 부부는 음식을 나르고 주변 정리를 하고 아버지를 닮은 키 큰 아들이 만들어 주는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으며 여름의 시간에 기대었다.

저 멀리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곳에 눈을 맞추고 버드나무 끝자락에 시간을 멈추니 휴식의 시간이 감사한 마음에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J와 설천에 있는 버드나무 숲을 거닐었다. 여름의 시간을 가자 많이 보낸 나이 어린 벗이다.

J의 여름은 자동차를 준비하기 위해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중고차를 산일이 여름의 계절에서 제일 잘한 결정이라고 했다.

여름의 시간에 멈춤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성장과 성숙의 시간이 값진 시간이라고 했다. 각자의 삶에서 자신의 열정을 부린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J의 선택과 집중을 위한 시간을 응원해 주며 여름의 시간에서 각자의 여름의 시간에 기대어 잠시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여름은 찬란했다.

풀벌레 소리, 냇물 소리, 수박 한 조각에 담긴 시원함까지 모두 기억난다.

하지만 어른이 돼 맞이하는 여름은 조금 다르다. 무더위 속에서 치러야 할 일상, 멈출 수 없는 책임, 그리고 때론 버거운 관계들. 그 속에서도 우리는 여름을 살아 내지만 여름이 그런 계절이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보다는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계절.

해가 길어진 만큼 마음의 그림자도 길어지지만, 그 또한 우리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쉼표가 돼 준다. 그러니 이 계절엔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봐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도 계절은 조금씩 저물어가는 시기는 이슬이 내려앉고, 깊은 밤이 되어 바람은 살짝 가볍고 선선해졌다.

짧은 장마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뜨거운 햇살이 아니라 허전함이다. 한 계절이 지나가는 시간에 그 속에서 내가 어디쯤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여름은 시간을 유예시키는 계절 같다. 너무 더워서 서두르지 않고, 너무 밝아서 깊은 어둠을 잊게 한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천천히 걷고, 느리게 생각하고, 때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을 내려놓고 삶의 속도가 의도적으로 늦춰지는 그 순간, 비로소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얻는다.

여름의 시간에 기대어 버둥거리며 달려왔던 시간을 잠시 멈춰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리의 삶의 귀퉁이에 많은 것들이 나를 멈추게 하는 계절 여름의 시간이다.

한낮의 태양이 창을 두드리는 여름의 시간에 초록빛 바람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숲에서 그때껏 울어도 지치지 않는 풀벌레 노래를 들으며 숲속을 걷는다.

푸르게 익어가는 사과 향기가 넘실거리는 시골의 개울가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세며 여름의 시간에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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