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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복 영화감독 |
그러나 현실에서 약속은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지각과 핑계와 변명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필자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연출자로서 영화 제작의 전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해왔다. 영화는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시간, 자원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과 종착점에는 언제나 ‘약속’이 존재한다.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배우 캐스팅, 리딩, 촬영 일정, 후반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은 치밀하게 계획된 약속 위에서 움직인다. 각각의 단계는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물려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전체 일정은 쉽게 균형을 잃는다.
그렇기에 영화 제작 현장에서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일에 가깝다. 단 한 번의 지연이나 변수가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쳐 결국 제작 전반을 멈춰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개인의 창작을 넘어선 집단의 약속 위에 세워진 결과물이며, 그 약속의 무게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는 관객과 만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 그 첫 관문이 바로 개봉 전 진행되는 시사회다. 시사회는 단순한 ‘미리보기’ 행사가 아니다. 작품의 완성도를 점검하고, 관객의 반응을 통해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는 중요한 과정이다. 감독과 배우, 그리고 수많은 스태프들에게는 그동안의 노력이 평가받는 긴장과 설렘의 자리이기도 하다.
시사회에는 지인과 업계 관계자, 전문가들이 초대된다. 제한된 극장 좌석에 맞춰 신중하게 초청 명단이 구성되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행사 분위기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다르다. 참석을 약속하고도 아무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는 ‘노쇼(no-show)’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주최 측은 실제 좌석 수보다 더 많은 인원을 초대하는 이른바 ‘오버부킹’을 감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객석 곳곳이 비어 있는 풍경은 단순한 미관의 문제가 아니다. 행사 전체의 밀도를 떨어뜨리고, 무엇보다 현장을 지켜보는 창작자들에게 깊은 허탈감을 안긴다.
물론 개인 사정으로 참석이 어려울 수 있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경우라면 일정 조정이나 대체 초청이 가능하다. 문제는 아무런 설명 없이 불참하는 경우다. 가벼운 약속처럼 여겨지는 태도는 결국 누군가의 오랜 노력과 시간을 가볍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시사회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영화라는 집단 예술의 마지막 점검 무대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 한 명 한 명이 작품의 완성도를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자다. 그렇기에 ‘참석’이라는 약속은 생각보다 무겁다. 작은 책임감이 모여 한 편의 영화가 더욱 빛날 수 있다.
필자가 ‘약속’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대중 전라남도 교육감이다. 그는 교육 행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독서, 영화, 인공지능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배움과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궁금한 분야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어서라도 학습에 몰두하고 배우는 모습은 배움을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즐기는 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2년 전, 필자는 전남 화순의 작은 학교인 청풍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영화 제작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이 수업의 결실로 완성된 작품은 ‘제1회 전라남도 작은학교 영화제’에 출품되어 극장 상영이라는 뜻깊은 기회를 얻었다.
상영회 당일, 김대중 교육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학생 감독과 배우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아이들은 다음 작품에 교육감의 출연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당시 필자는 이를 흔한 격려의 인사, 일종의 의례적인 약속으로 가볍게 여겼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힐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1년 뒤, 다시 시작된 영화 제작 수업에서 아이들은 그 약속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교육감 역시 그날의 약속을 메모해두고 잊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약속의 의미와 책임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약속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지키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아이들과의 약속은 더욱 그러하다. 어른의 말 한마디는 아이들에게 신뢰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지켜지는 작은 약속들이다. 그 축적이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관계를 지탱하며, 관계가 공동체를 유지한다. 약속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기복 gn@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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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7 (목)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