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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당금 예술이 빽그라운드 대표 |
무대 위에서 좋은 연기란 정(靜), 중(中), 동(動),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는 ‘Pause(멈춤)’의 조화로 완성된다. 정적인 순간에도 내면은 동적이어야 하며(정중동), 격렬하게 움직이는 중에도 중심은 정적이어야 한다(동중정). 이 모든 에너지를 응축하고 조절하는 핵심은 바로 멈춤-pause의 지점이다. 연극에서 멈춤-Pause는 다음 대사를 터뜨리기 위한 팽팽한 ‘에너지의 응축’이다. 그것은 더 강력한 전진을 위한 전략적 멈춤이다. 관객을 압도하는 연기는 바로 그 찰나의 틈새에서 태어난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그 지점을 무의식적으로 안다.
하지만 무대 위가 아닌 삶의 길 위에서, 나를 비롯한 당신은 이 멈춤의 기술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제주 올레길 2일 차, 6코스 쇠소깍에서 보목포구를 거쳐 여행자센터로 이어지는 10.1㎞의 길은 초보자도 3~4시간이면 충분한 경량급 코스다. 한라산 등반을 앞둔 워밍업이자, 저녁 약속을 앞둔 여유로운 도보계획이다. 치밀한 계획은 늘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에 시작은 한없이 가벼웠다. 용암이 빚어낸 소천지의 비경에 넋을 잃고 점심 후 짧은 낮잠까지 즐길만큼 여유로웠다. 오수에서 깨어나 시간을 보니 예상보다 꽤 오래잠을 자버렸다. 느긋했던 마음이 약속 시간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이 들이닥쳤다. 빠른 걸음으로 숲길을 빠져나와 이정표를 따라 갔으나 어느 순간부터 올레 표식이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휴대폰 배터리는 10%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그 와중에 걸려온 전화는 흐트러진 집중력을 파편화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갈림길에서 비로소 ‘의심’이 고개를 들이 밀었다.
“이 방향이 맞아?”
올레길과 산티아고 순례길은 시그널의 표식이 잘되어 있어서 그 길만 따라가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 된 거지’ 뇌활동에 버퍼링이 걸렸다. 배낭에 든 지도를 확인했다면 가던 길이 정방향임을 단번에 알았겠지만, 나는 아날로그적 확인을 건너뛰고 이미 꺼져가는 구글 맵에 집착했다. 멈춰 서서 지도를 꺼내는 그 짧은 찰나조차 아까울 만큼, 의심에 포박된 자아는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결국 나는 정방향을 돌려 역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조급함은 길 위에서 숨이 턱 끝까지 치밀게 했고 에너지는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그렇게 골목을 휘저어 도착한 곳은 허망하게도 조금 전 내가 걸어왔던 바로 그 길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해서 돌았던 것이다. 한순간 들이닥친 의심이 나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문학 속에서 의심은 종종 파멸로 묘사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가 이아고의 간계에 빠져 파멸했다면, 알베르 카뮈의 ‘오해’에서 가족은 소통의 부재와 오판으로 오래전 집을 떠난 아들이자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극으로 치닿는다. 나의 의심은 이 두 비극의 변주였다. 의심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조급함에 가속화하고 조급함은 생각을 잠식하며 나를 혼란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 경험은 나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평온하던 마음에 의심이 든 건가.
의심의 원인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가장 원초적인 능동의 행위인 ‘걷기’가 디지털 기기라는 수동적 의존물에 의해 제한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초간의 혼란에서 단 1분만이라도 모든 판단을 멈추고 관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짧은 정지조차 허락하지 않는 불안 때문에 표식 하나로 인해 맹렬하게 오가길 반복했다
버그에 침식당해 렉에 걸린 프로그램 마냥 속수무책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시그널이 보이지 않을 때 지도를 꺼내는 대신 더 빨리 뛰었던 올레길의 의심은, 회복이 필요한 몸을 이끌고 공연을 강행해야 했던 ‘불안’의 다른 이름이었다. 철학자들은 의심의 순간에 ‘에포케 Epoche’ 즉 판단 중지를 권한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 공포는 이 멈춤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철학에서 말하는 에포케(Epoche)는 내가 가진 편견과 공포를 괄호 안에 묶어두는 ‘판단 중지’다. 포즈가 연극무대에서 폭발력을 얻기 위한 긴장이라면, 에포케는 본질을 보기 위한 고요한 내려놓음이다. 나의 지난 120일이 그러했다. 뇌수술이라는 거대한 생의 시그널이 요동치는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회복에 침잠하는 에포케였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술 후 불과 3개월만에 충분치 않은 배터리를 움켜쥔 채 한달여간 연극 ‘더 파더’의 무대 위로 나를 내몰았다.
올레길에서 표식을 잃었을 때 뛰기를 선택했던 것처럼, 내 몸의 경고음을 외면한 채 공연이라는 익숙한 거점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내 안의 에너지를 유예 없이 탕진해야만 했다. 가장 능동적이어야 할 순간에 우리는 얼마나 수동적으로 불안에 굴복하는가. 의심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만, 그 움직임이 늘 전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안다. 시그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믿지 못해 시그널을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지도를 보지 않아도, 혹은 잠시 길을 잃어도, 멈춰 서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가 내 안에 깃들기를 소망한다. 멈출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길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무대 위에서 찰나의 포즈를 장악하는 법은 무의식적으로 익혔으나, 삶의 길 위에서 이 낯선 에포케를 실천하기란 33년차 배우에게도 무척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라는 긴 연극에서 나는 길위에서? 제대로 된 ‘Pause’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당신들도 그러하시길!
이당금 gn@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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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7 (목) 1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