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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화 교육학박사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따뜻한 어묵, 그리고 학생들의 웃음소리. 낭만자객이라도 된 듯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워진다. 친구와 어묵 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수다를 떠는 청춘, 나뭇잎 하나가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웃음이 터지는 시기다.
며칠 전 지인들과 가을꽃을 보러 갔다. 형형색색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예쁜 꽃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카페에 앉았다. 그런데 지인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감정이 메말라 가고 있을까.’ 어린 시절에는 작은 것에도 마음이 움직였다. 비 온 뒤 생긴 물웅덩이를 첨벙거리며 좋아했고,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에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친구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것에는 감탄하지 않게 되고, 웬만한 일에는 마음이 크게 움직이지 않아 씁쓸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보아도 잠시뿐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곳을 찾아가고, 예쁜 물건을 사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조금 지나면 또 다른 자극을 찾는다. 어쩌면 우리는 재미가 없는 사회에 사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자극 속에서 재미에 익숙해져 버린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인의 이야기를 듣자니 27년 트랜드를 소개하는 ‘권태사회’라는 언어가 떠올랐다. 권태사회는 개인의 감정이나 부부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권태’를 넘어, ‘사회 전체가 반복과 익숙함 속에서 무기력과 무관심을 경험하는 현상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권태는 단순히 지루하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마음이 무뎌지고, 새로운 것에도 쉽게 감동하지 못하며, 무엇을 해도 오래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다. 그렇다면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더 크고 강한 자극을 찾아야 할까.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더 자극적인 것을 찾기보다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작은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권태 사회의 관련된 언어를 찾아보니 관계, 일상, 소비, 사회, 감정의 권태를 제시한다. 여기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요즈음 가장 권태를 느끼는 것은 정치의 권태다. 정치 이야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진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가 잘못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짜증만 난다. 처음에는 화가 나고, 기대도 하고, 새로운 변화가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비슷한 주장과 반박, 반복되는 갈등과 공방을 계속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무뎌진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지나쳐 버린다. 이것이 어쩌면 정치의 권태인지도 모른다. 정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치가 너무 많이 보이는데도 정작 내 삶을 움직이는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상태다. 정치적 권태는 단순한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반복되는 갈등과 공방 속에서 공동체의 문제에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첨단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속도도, 더 새로운 자극도 아닐 것이다. 잠시 멈추어 익숙한 것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작은 것에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여유를 되찾는 일일 것이다. 새로운 것은 넘치는데 마음이 권태롭다면, 이제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먼저 새롭게 바라볼 때인지도 모른다.
권태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재미가 아니라 감탄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걸음을 조금 늦춰볼 일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에도 잠시 눈길을 주고,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자.
어쩌면 권태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극이 아니라, 다시 설레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산하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아직도 작은 것에 마음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김명화 gn@gwangnam.co.kr 김명화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10.22 (목) 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