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광남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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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출판

[2025 광남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은하계 미르
양지영

은하계 미르(화가 한희원 삽화)
분명 사람 발소리다.

은하는 잽싸게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검은 형체가 휙 내달리는 게 보였다. 얼핏 보아 몸집이 작은 사람 같았다. 은하는 며칠 전 아빠가 놓친 신비초 도둑일 거로 생각했다. 놈은 그날 신비초 훔치는 걸 실패했다. 그러니 다시 온 게 틀림없다.

‘아빠한테 연락할까? 아니야. 그럼 늦어.’

아빠는 지금 한남시 본부에서 회의 중이다.

‘내가 잡는다!’

은하는 팜팩토리 문을 박차고 나가 놈의 뒤를 쫓았다. 놈은 산꼭대기를 향해 달렸다.

‘쳇, 이 정도는 눈 감고도 오를 수 있지.’

이 길은 은하가 다섯 살 때부터 열두 살인 지금까지 아빠랑 매일 오르내린 산길이다. 은하가 펄펄 나는 듯이 따라잡는 것에 비해 놈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위태로웠다. 격차가 점점 좁혀졌다.

그때였다.

‘턱’ 놈이 그만 돌부리에 걸려 다리를 휘청거렸다. 절호의 기회다. 은하는 부웅 날아오르듯 몸을 날려 오른발로 놈의 등을 세게 차버렸다. ‘욱’ 놈이 짧은 신음을 내뱉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잽싸게 팔로 놈의 뒷목을 눌렀다.

아빠는 하나밖에 없는 딸인 은하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면서. 그럴 때마다 은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아빠한테 배운 태권도가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사, 살려 주. 켁켁.”

놈은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겨우 몇 마디 내뱉었다.

‘어라? 어린애잖아.’

순간 은하는 당황했다. 누르고 있던 팔을 얼른 풀고 일어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도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더니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구불거리는 노랑머리가 귀 옆을 살짝 덮었다. 갈색 눈동자와 오똑한 콧날이 노랑머리와 잘 어울렸다. 은하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남자 아이다. 이상하게 한남시 사람들이 입는 쿨링 슈트와 다른 슈트를 입고 있었다.

“너, 신비초 훔치려던 거지?”

은하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대가는 지불할게.”

아이는 은하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대가? 신비초가 얼마나 귀한 건 줄 알기나 해? 그냥 약초가 아니라고!”

은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은하가 태어나기 전 지구는 식물이 잘 자라는 살아있는 땅이었다. 2077년인 지금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했고 결국 몇몇 도시는 물에 잠겼다. 사람들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터전을 옮겼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큰돈을 들여 외계행성에 지은 우주 거주국으로 떠났다.

아빠와 남은 사람 중 일부는 지금의 한남시에 자리를 잡고 작은 도시를 이루었다. 얼마 안 되는 땅을 일구어 농사를 시작했지만,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기후가 아니었다. 생명공학자였던 아빠는 온실처럼 생긴 팜팩토리를 세워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온도 습도를 조절해서 채소를 키워 한남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이 년 전 아빠는 팜팩토리에서 신비초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인간의 몸을 서서히 굳게 만드는 바이러스에 대항해 면역력을 강화하는 약초다. 신비초는 척박한 의료 환경에 놓인 한남시 사람들의 생명 보호막이나 마찬가지다.

은하는 주저하지 않고 워치에 있는 비상 버튼을 눌렀다.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은하의 위치가 비상 대응팀에 전달되었을 거다. 이제 사람들이 몰려오겠지. 아이가 주춤대며 뒷걸음질 쳤다. 은하는 아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팔을 콱 움켜잡았다. 아이 몸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아이는 곧바로 상황실로 끌려갔다.

은하 아빠와 아이가 부스 안에서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은하는 아저씨들 틈에 껴서 부스 유리창을 통해 둘을 지켜보았다. 부스와 연결된 스피커로 둘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름이 뭐야?”

아빠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미르.”

아빠는 미르가 입고 있는 슈트를 자세히 살폈다. 미르는 우주복처럼 생긴 은빛 슈트를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둥근 마크가 달려 있었다. 푸른빛과 흰빛이 어우러진 것이 마치 바다 위에 하얀 구름이 떠 있는 모습 같았다. 은하는 그 모습이 책에서 보았던 예전의 지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마크 위에 쓰여 있는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프.록.시.마. 프록시마에서 온 거야?”

아빠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프록시마에 대해 무언가 아는 낯빛이다.

“신비초를 가져오라고 시킨 사람이 누구야?”

아빠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요.”

미르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신비초는 왜 필요한 거지?”

“우리 행성에 원인 모를 전염병이 퍼졌어요. 병에 걸리고 사흘이 지나면 몸이 서서히 굳어가요. 나중에는 심장까지 굳어서 죽게 돼요.”

미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혼자 여기까지 왔다고?”

“이상하게도 아이는 걸리지 않고 어른만 전염돼요. 할아버지와 아빠도 이 병에 걸려서 육 개월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제 엄마까지 전염돼서 몸이 굳고 있어요. 최근에 지구에서 우리 행성으로 온 사람한테 들었어요. 한남시 팜팩토리에서 누군가 신비초 재배에 성공했다고요. 신비초만 있으면 우리 엄마를 살릴 수 있어요.”

미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엄마’라는 말에 은하의 가슴이 뻐근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은하 마음 깊은 곳에 잠자고 있었나 보다.

아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아무 대꾸 없이 부스 밖으로 나왔다.

“저 녀석 말이 사실일까?”

“거짓말 같지는 않아.”

“어린애가 용기가 대단하네.”

부스 밖에 있던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했다.

“다들 기억 안 나? 프록시마로 떠난 사람들이 우리한테 한 짓 말이야!”

아빠가 눈썹을 움찔했다.

한남시는 풍족한 먹거리와 첨단 시스템을 갖춘 화려한 도시였다. 하지만 기후 위기로 도시는 서서히 병들었다. 사계절은 없어지고 높은 기온 탓에 사람들은 쿨링 슈트를 입어야 했다. 식물은 제대로 자랄 수 없었고 해수면은 서서히 상승했다. 시 정부는 나름대로 대책을 마련했지만, 지구가 병드는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늦었다.

은하계 미르(화가 한희원 삽화)
십 년 전 시 정부와 항공우주 회사인 스페이스컴퍼니가 외계행성 이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시 정부가 선택한 행성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프록시마다. 스페이스컴퍼니는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행성에 사람이 살 수 있게 테라포밍하려면 많은 돈이 든다고 했다. 이주를 원하는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들은 몇 년간 돈을 나눠 냈다. 은하 할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행성 이주가 임박했을 때 일이 터졌다. 시 정부 관계자 한 명이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시 정부 고위층과 스페이스컴퍼니는 행성 테라포밍에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이 들자, 사람들을 속였다. 돈은 돈대로 받아 챙기고 자기들만 이주 우주선에 몸을 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시 정부와 회사 측에 거세게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시 정부는 이들을 폭도로 몰아 폭력으로 진압했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은하 할아버지도 그때 돌아가셨다.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야! 자기들만 살겠다고 떠나더니 또 우리 걸 빼앗아가려고 해?”

아빠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은하는 언젠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아빠한테 들은 적 있다. 그날 아빠는 은하를 앞에 두고 한참을 울었었다.

아빠는 미르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러 아저씨들과 회의실로 갔다.

은하가 부스 안으로 들어가 미르 앞에 섰다. 아빠 대신 미르에게 따져 물을 작정이었다.

“행성 사람들이 우리 할아버지와 사람들을 속이고 죽게 했어.”

“나도 알아. 우리 할아버지한테 들었어.”

미르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은하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알면서 신비초를 달라고? 너무 뻔뻔한 거 아니니?”

“염치없는 거 알아. 하지만… 엄마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르의 말에 은하는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은하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엄마는 당시 유행하던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행성에 퍼진 전염병과 같은 증상이었다. 병에 걸린 지 한 달 만에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아빠는 바이러스 퇴치 연구를 시작했고 결국 신비초 재배에 성공했다.

“시간이 없어. 신비초 조금만 나눠줘. 부탁할게.”

미르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은하의 마음도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너희처럼 이기적인 사람들에겐 조금도 줄 수 없어.”

은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르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은하가 뒤돌아 부스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미르가 은하를 거세게 밀치고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은하는 벽에 세게 부딪쳤지만 잽싸게 미르의 뒤를 쫓았다. 미르는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미르가 뛰어가는 방향이 팜팩토리를 향하고 있었다. 은하의 머릿속에 불길함이 스쳤다.

그때였다.

“아악!”

내리막길에 접어든 미르가 발을 헛디뎠다. 미르는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뒤쫓던 은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미르!”

은하가 정신없이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며 미르를 소리쳐 불렀다. 미르는 머리에 피가 흐른 채 내리막길 끝에 널브러져 있었다. 은하가 워치의 비상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작은 도시를 가득 채웠다.

미르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병실에 누워있다. 은하가 침대 옆에 서서 잠든 미르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간절했구나.”

은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자니?”

시 관계자 아저씨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깼다가 도로 잠들었어요.”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아빠는?”

“팜팩토리에 가셨어요.”

“이 녀석 소형 우주선을 타고 왔더라고. 우주선에서 이게 나왔어. 아빠 오시면 전해 드리렴.”

아저씨는 은하한테 태블릿을 건네고 병실을 나갔다.

은하가 태블릿 전원을 켰다. 태블릿 안에 있는 자료를 살펴보던 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금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잊으려고 애썼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아빠가 병실로 들어왔다.

“왜 그래? 은하야.”

아빠가 양손으로 은하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은하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자료를 터치해 병실 벽으로 날려 보내는 시늉을 했다. 하얀 벽에 마치 영화처럼 영상이 재생되었다.

흐려진 눈동자. 바싹 마른 몸. 어눌해진 말투. 아픈 미르 엄마다.

“신비초… 조금만 나눠주세요. 흠. 지금 우리… 행성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흐음.”

미르 엄마는 숨이 넘어갈 듯 말을 이었다.

“지구를 떠날 때. 후우. 당신들께 한 행동은 정말… 미안합니다. 사, 살려주세요.”

미르 엄마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태블릿 전원을 꺼버렸다. 은하 엄마를 떠나보내던 때가 떠올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은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애써 울음을 참았던 은하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울음을 막을 수 없다.

“아빠, 미르 엄마도 우리 엄마처럼 죽으면 어떻게 해? 다른 사람들은 엄마처럼 죽지 않게 하려고 신비초 재배한 거잖아. 행성 사람들도 지구인이잖아.”

은하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아빠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아빠는 은하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며칠 뒤 아빠는 시 관계자들을 설득해서 신비초를 프록시마로 보내기로 했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신비초 재배에 성공한 아빠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우주복을 입은 미르가 헬멧을 쓴 채 조종석에 앉아 있다. 미르는 신비초가 담긴 상자를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높게 세웠다.

잠시 뒤 조종석 문이 닫혔다.

은하는 미르가 남긴 말을 되뇌었다.

‘고마워. 지구와 지구인의 사랑, 잊지 않을게.’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땅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아빠가 은하의 머리를 당겨 가슴에 품었다.

진동이 멎을 때쯤 우주선은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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