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누구] 흙수저가 만든 기적…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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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은 누구] 흙수저가 만든 기적…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서다

소년공 생활하다 왼팔 장애
주경야독으로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로 약자들 목소리 대변
사법리스크·흉기 피습 등 위기
총선 압승으로 대권 지위 다져
윤 탄핵 조기대선서 마침내 당선

검정고시 수험표
소년공시절 동료 형들과 야유회(붉은옷이 이재명)
(왼쪽부터)생애 첫 교복으로 입고 간 중앙대 입학식(어머니와)인권변호사 시절신혼 시절
중앙대 재학시절 친구들과 자전거 무전여행(가운데)
이재명과 부인 김혜경


2025년 6월 3일, 대한민국은 제21대 대통령으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선택했다. 기초단체장, 전직 도지사, 국회의원, 당 대표 등 화려한 정치 이력 뒤에는 한 사람의 불굴의 삶이 존재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소외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서사다.



△“가난은 내 운명이 아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1963년 12월 8일, 경북 안동군 예안면 도촌동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일곱 남매 중 다섯째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 서울 인근으로 이주한 수많은 가족들처럼, 성남시로 이사해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그가 일한 공장은 프레스 작업이 중심이었고, 이 과정에서 팔을 기계에 눌리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열다섯 살, 그는 ‘장애인 소년공’이라는 이름 없는 존재로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재명은 굴하지 않았다. 야간학교와 검정고시를 통해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뒤,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9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가 됐다. 그는 성남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자, 철거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성남시립의료원 설립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면서, 정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성남시장, 경기도지사로 ‘행정가’ 자리매김

2004년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 당시 성남시는 재정 파탄 상태였고, 이재명은 과감한 구조조정과 복지 확대라는 양면 전략을 통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전국 최초로 청년배당, 무상교복, 무상산후조리 서비스 등을 도입했고, 성남시립의료원 설립도 마무리했다.

중앙 정치권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16년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가 성남시 등 경기도 6개 지방자치단체의 세입 5000억원을 다른 지자체에 배분하기로 하자 11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해 10월 ‘박근혜-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고, 제도권 정치인으론 처음으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하야를 공개 주장했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참여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하지만 문재인(57.0%)·안희정(21.5%) 후보에 의미 있는 3위(21.2%)를 자산으로 삼아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시기에는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대출’ 등 ‘기본 시리즈’ 정책으로 정책 브랜드를 확립했다.

‘친형 강제 입원’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으나, 2020년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고 무죄를 확정받으며 고비를 넘겼다.



△대권 도전의 실패와 재기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이낙연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해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됐다. 하지만 2022년 3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0.73%p 차이로 패배했다. 이는 역대 대선에서 가장 적은 격차 중 하나로, 패배 이후에도 정치적 존재감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기반이 됐다.

대선에서 패한 후보들은 당분간 ‘휴지기’를 가졌던 전례와 달리, 이재명은 대선 패배 직후 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 2022년 6월 지방선거를 이끌었다.

동시에 자신은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고자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을 비우고 떠나자 그곳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이재명 자신은 당선되고 당은 선거에 참패하자 당내 비명(비이재명)계를 중심으로 대장동 특혜 개발 의혹 등 ‘사법리스크 방탄용’ 보선 출마라는 비난이 일었다.

그런데도 당의 구심점 역할을 할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 속에 2022년 8월 당 대표로 선출된다.

당 대표 취임 1년을 맞은 2023년 8월 31일, “무능 폭력 정권에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고, 당시 국민의힘에서는 사법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단식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 검찰은 그 이후 두 번째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9월 23일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이재명은 다시 한번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9월 27일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며 다시 한번 벼랑 끝에서 살아남았다.

지난해 1월 2일에는 부산 가덕도신공항 부지 방문 도중 목에 칼을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동맥 손상을 피해 목숨을 건진 뒤 이끈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을 견인하며 대권 주자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또다시 찾아온 기회…대통령 당선

이재명의 대권 도전의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2024년 12월 3일, 국회의 탄핵소추와 예산 삭감 시도 등을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하고,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는 등 국회 활동을 방해했다. 이는 헌법에 보장된 국회의 기능을 침해한 것으로, 헌법재판소는 이를 중대한 헌법 위반으로 판단하고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조기 대선 정국이 열리면서 이재명은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민주당 후보로 공식 추대된 그는 ‘민생 대통령’, ‘유능한 행정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중도층과 청년층에 집중하며 ‘실용주의’와 ‘사회경제적 개혁’을 병행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출발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첫 사례가 됐다.
이현규 기자 gnnews1@gwangnam.co.kr         이현규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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