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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임남진씨는 “좋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막연하지만 저는 맑고 그윽한 기운을 내뿜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평가받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
올들어 열린 강진아트홀 전시(2.24∼3.14) 때 공간이 워낙 크다보니 구작과 신작 전체해서 화업 30년을 결산하는 자리가 됐다고 한다. 쉴새없이 꾸준하게 작업을 펼쳐온 임남진 작가(서양화)의 이야기다.
그가 화가가 된 계기는 유년 시절 그림을 좋아해서다. 하지만 88학번이어야 했던 그는 91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때는 그림에 대한 고민이 컸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이라서 학내투쟁이 있었고, 또 미술운동이 막 일어나는 시점이어서 학생회나 미술회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하고 조우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시대는 격화되고, 더 어수선할 수 밖에 없었지만 학교 안에서 배우지 못하던 것을 배우기 위해 광미공 활동을 하면서 진보진영 쪽 겨울미술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미술에 대한 한없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학교 수업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습득하는 기회가 됐다. 작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처럼 20대 때는 시대상황이 군사독재 정권 혹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제3세계 미술에 관심이 컸었고,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깊은 고뇌와 사유에 빠져 지냈다. 막연하게 좋은 작가가 되고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 대해 늘 고민했으나 그 실체는 알길 없었다. 그러다가 1993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고려불화전을 보고 큰 감동을 받는다.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전시였다.
이 고려불화전은 이상호 작가의 스토리에서도 등장한다. 다시 한번 고려불화가 지역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이 자못 작지 않다는 점을 실감하게 됐다. 임 작가 역시 고려불화가 뇌리를 후려치는 무언가로 다가왔던 셈이다. 전통에 관심이 생길 무렵, 거기다 휘발성을 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작가는 우리 문화와 미술에 부쩍 관심이 높아진다. 더불어 광미공을 통해 주시했던 제1세대 민중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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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남진 작 ‘연서’ |
그는 오월 영령들을 위한 작업은 물론 사회 고발적인 작품, 세상을 이끄는 민중의 힘 등을 인식하면서 민중미술운동을 민미협에 속해 활동을 펼쳐나가기도 했지만 ‘이렇게 가는 것이 맞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중에 1세대 선배화가들의 몫인 거지, 자신의 세대 몫은 아닌 듯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른 목소리를 찾아나섰다.
전통 형식 안에서 그것의 해법을 찾고 싶어 했다. 현실 이야기들을 모두 수용하고 투영할 수 없기에 어느 정도 걸러내되, 폭넓은 작업 방향을 모색하면서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구축하고픈 마음이 컸다. 그래서 그는 불화에 주목했다. 구체적으로는 감로탱화에 빠져 든다. 형식과 기법을 그것으로부터 차용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성을 탈피해 풀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감로탱화라는 형식이 자신이 막 세상이야기를 담고 싶어할 때 어떤 형식으로 다가왔고, 그것이 맞아 떨어졌다는 귀띔이다.
하지만 수박겉핥기식이 아니라 깊이있게 공부를 하면서 종교적 색채를 빼내면서 인간적 면모에 접근, 이를 회화적으로 풀어보고자 했다. 그에게 불화나 감로탱화는 일종의 정거장과 같다. 그가 머물러 가는 중심이자 담을 그릇 역할이 필요했는데 그 안에 담은 것이 불화나 감로탱화였던 것이다.
“서양화 기법으로 할 수 있었을텐데 못하고 넘어 왔을 수 있습니다. 전통미술 안에서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불자가 아님에도 형식에 취해 있었고, 형식에 색상 이야기를 담기를 갈구했죠. 그러다가 불화의 현장과는 선덕사에서 대면했죠. 선배화가인 이상호 작가가 탱화를 맡았었는데 혼자 하다보니 점안식에 작업기일을 맞추기가 어려워 후배 몇명을 불렀어요. 그중에 한 명이 저였죠. 선배가 끝나고 나서 곧잘 한다고 전해 주더군요.”
그때 화가로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라 미술 도구들이 귀했는데 작업하고 남은 물감하고 비단천을 가져와 지장보살을 해 봤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감로탱화를 하면서 형식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져 자신의 기법으로 안착했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불화나 감로탱화에 빠져들수록 회화에서 종교색을 조금 빼내는 게 관건인데, 그를 위해 노력을 했다고 한다. 너무 종교에 부합되게 작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후문이다. 종교적인 것에 부합되게 작업을 한다면 전수자를 해가지고 작업증을 따 전통불화를 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는 반응을 들려줬다. 불화 형식을 차용하긴 했지만 조금 더 회화적이고 일반적인 회화 작품으로 접근하고 싶었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제가 20대 사고로 돌아가면 감로탱화 형식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20대였기 때문에 더 좌절도 많이 하고 암담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론도 잘 몰랐습니다. 이 형식 안에서 세상 이야기를 펼쳐내도 시행착오와 겪어내야 할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잖아요. 일상이 반복되긴 하지만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것이고, 버텨지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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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남진 작 ‘연서’ |
그는 풍속도를 지속하다 들었던 생각이 시였다. 시들을 보면 단어 하나 하나에 수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듯 길지 않은데 몇줄 안에 모든 의미가 들어있잖아요. 그처럼 그 몇줄이 회화처럼 머리 속에서 다 그려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자신의 그림에서 재현해보기를 희망한다.
그는 물상에 대해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물을 하나의 대상으로 볼 것이냐, 심상으로 바라볼 것이냐 사이에 엄청나게 큰 격차가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히기에 그렇다. 그리고 서사적인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어떤 순간에 인간 내면을 탐구하고 보여주는 방식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전한다. 이때가 그의 나이 불혹을 맞을 때 또 다시 든 생각이었다.
“이 방식으로 계속 작업해도 맞나 고민을 시작하던 때 였죠. 그런 고민의 출발점이 이때였어요, 사람들이 탱화 형식의 풍속도 시리즈를 좋아하긴 했는데 이걸 지속할수록 자기복제를 계속 하는 것 같았고, 시들시들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백지가 돼서 작업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어요.”
불화이든, 감로탱화이든 주제의식을 잡아주기는 하지만 형식과 기법면에서는 이 그림이 이 그림 같고, 저 그림이 저 그림 같은 한계와 틀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다 그 반대 쪽에는 기독교라든가 천주교, 그리고 다른 풍속들이 놓여 있다. 이것들이 생각에 미칠 경우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16세기의 네덜란드 출신으로 풍경화를 전통적인 역사화와 종교화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 피터 부뤼겔(Pieter Brueghel·1525∼1569)이나 네덜란드 출신 화가로 ‘초기 네덜란드파’라고 하는 플랑드르파의 대표 주자 중 한명인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1450∼1516)의 회화세계에 주목하면서 동서양의 종교가 갖는 것이 비슷하기에 그것을 비교해서 많이 살폈다는 답을 내놓았다.
특히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회화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작가는 개인전이 2007년에 열렸을 정도로 늦었다. 이처럼 개인전이 늦은데는 서양화 전공인데 다분히 한국화적인 회화 작업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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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남진 작 ‘연서’ |
박수만, 표인부 작가와 함께 오는 31일까지 이강하미술관에서 ‘서정적 순간, 그 이후’라는 타이틀로 한 3인전을 진행 중이라는 그는 마지막으로 ‘연서’ 시리즈를 지속해나갈 뜻을 내비치며 어떤 작가로 평가받을 것인지에 대해 밝혔다. 그는 오십 넘어 몸에 대한 개념이 조금 바뀌면서 몸을 탐구해서 몸을 주제로 그림작업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체중을 가지고 그냥 몸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엄마 몸을 오십 넘어 봤는데 사람마다 피부색도, 주름도 다 다르게 생겼듯 몸의 결을 관찰할 겁니다. 주름마다 삶의 흔적들이 박혀져 있는데 그것을 삶의 사연으로 읽히게끔 몸을 표현을 해볼까 해요. 늙어가면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한편, 나이를 먹어가는 몸이 필요없는 게 아니라 ‘연서’ 시리즈로 확장하고 싶죠. 아울러 좋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막연하죠. 하지만 저는 맑고 그윽한 기운을 내뿜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평가받을 겁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