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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주 문화체육부장 |
직장이 타이트하면 타이트할수록 거기서 받는 압박감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커 진다. 비빌 언덕이 있으면 스트레스는 덜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멘탈이 붕괴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날은 퇴근해서 안온한 집으로 돌아왔어도 정신이 멍하다. 좀체 멘탈이 잡히지 않아 음악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듣거나, 게임을 해보거나, 호프집 귀퉁이에 앉아 홀짝 홀짝 무언가를 들이킨다. 또 친구에게 전화해 하소연하거나, 어두컴컴한 방 침대에 누워 멍을 때리거나, 길든 짧든 여행 혹은 마실을 가거나 등등 미덥지 않은 자구책(?)을 고안해 멘탈이 잡히고 스트레스가 풀리길 기다린다. 이런 것에 비춰 보면 직장생활은 그야말로 정글이라는 용어가 제격이다.
누군가는 이 정글을 벗어나기 위해 사업이나 장사를 하고, 로또를 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하다. 또 누군가는 투잡, 쓰리잡을 하면서 미래의 달콤한 꿈을 꾼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살은 것인지 정답은 없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도 먹고 살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 필자는 재주가 없어 직장만 다니고 있다. 그러니 몸부림치는 이들에 비하면 필자에게 파이어족은 진작 물 건너 갔다. 여기서 파이어(FIRE)란 ‘경제적 자립, 조기 퇴직’(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첫 글자를 따 만들어진 신조어다. 고소득·고학력 전문직을 중심으로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투자를 늘려 재정적 자립을 추구하는 생활 방식이다.
직장생활을 짧게 하는 대신, 수입을 많이 늘려 남들이 30∼40년 직장생활을 해서 모아야 할 돈을 10∼20년 안에 다 모으고, 직장으로부터 해방돼 나머지 세월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직장인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모든 것을 조기에 갖추고 마흔 전후에 하고 싶은 대로 원없이 살아볼 수 있을테니 얼마나 행복할까. 이같은 파이어족을 꿈꾸는 것은 자유다. 현대 직장인들의 로망일테니까.
더욱이 직장 생활을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해 왔느니, 파이어족이라는 개념이 사치스러운 용어가 아니었을까 한다.
다만 정년 후 많은 시간이 주어질텐데 파이어족은 아니더라도 짧아도 좋으니 ‘문화적 파이어족’을 실행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파이어족에는 그닥 관심이 가지는 않지만, 문화적 파이어족에는 생각이 많다. 나이가 들기 전에는 그냥 파이어족이 한없이 부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보내온 시간들이 고통지옥이었더라도 파이어족이 안된 것을 자책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고백하건대 젊은 날에는 용어가 정립되지 않았지만 파이어족 같은 것을 과하게 꿈꾸지 않았을까(나 자신도 모르게). 물론 실현되지 못한 채 야속한 세월만 흘러갔지만 말이다. 직장인으로 무난하게 살아냈다는 착각으로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남아있는 시간들 또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당하게 시간이나 때우다가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혼을 갈아넣어도 부족할 판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더욱이 각 직장에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편해진다는 이야기는 옛말이다. 책임감의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현재 직장인들에게 파이어족의 실현은 성공적 삶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심신이 편한 삶의 대명사로 통한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일상을 구가할 수 있는 개념인 만큼 직장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혹은 나름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상’ 그 자체일 것이다.
파이어족은 필자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 중반 무렵 접해보지 못한 용어였다. 그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의 레이스가 펼쳐졌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찍부터 파이어족이라는 개념이 정립돼 있었다고한들 지금의 삶이 훨씬 편해졌을까 상상해본다. 인생 1막의 ‘파이어족’은 물 건너간 듯하다. 인생 2막의 ‘문화적 파이어족’은 그래도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것이 착각이더라도.
파이어족이든, 아니든 직장인들에게는 머리아픈 시간들이 많이 괴롭히고 지나갈 터다. 분명 파이어족은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닫힌 문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살벌한 직장으로 향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간간히 파이어족의 사례가 될만한 소식은 들려온다. 무한경쟁의 사회가 강고해질수록 파이어족에 대한 삶은 더욱 간절해진다. 허황된 꿈이라고만 치부할 일은 아닌 듯하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잘 감내하고 열심히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는 (문화적) 파이어족의 단서를 발견하지 않을까.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01.18 (일) 1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