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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가 8일 동학창도 제165주년을 맞아 본보에 동학 관련 자료 5점을 독점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
8일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82·광주 북구)는 동학창도 제165주년을 맞아 본보에 동학 관련 자료 5점을 독점 공개했다.
이중 천도교 영암군 교구장 임명장의 2점 크기는 가로 18.5㎝, 세로 21㎝이다. 상제교 신도증의 크기는 가로 10㎝, 세로 9.5㎝이고, 임명장(교첩)의 크기는 28㎝, 세로 23㎝이다. 천도교회월보의 크기는 가로 15㎝, 세로 23㎝로 이뤄졌다.
동학(東學)은 천주교에 대항하고, 양반사회의 모순과 파탄 속에서 사회 윤리의 퇴폐성을 절감하고자 1860년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1824~1864)가 창도했다.
1864년 최시형(1827~1898)이 제2세 교주가 되자 동학의 교세가 전국 8도에 널리 전파됐다. 그는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해 종교로서의 동학을 정립했다.
1984년 전라도 고부에서 남접대접주였던 전봉준이 ‘보국안민(輔國安民) 사상’을 외치며 최초의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자 최초의 항일 독립운동인 ‘동학혁명’에 나섰다. 당시 최시형은 교주로서 동학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의암 손병희(1850~1925)는 북접대접주로서 최시형을 보좌했다.
3세 교주가 된 손병희는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포교와 함께 항일운동에 헌신했다. 1908년 박인호(1855~1940)에게 교주를 인계했다.
이때 천도교의 교세가 가장 왕성했다. 전국에 천도교 교리와 보통교육을 가르치는 교리강습소를 700여 개가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적극적인 포교 활동 덕분에 1910년대 신도가 300만명에 달했다.
이후 손병희는 대내외적으로 천도교를 대표,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혼을 진작한 조선의 참스승이 됐다.
박인호는 교단을 다듬고, 독립운동 자금 집행과 조직 동원 등을 담당했다. 이후 3·1운동 때 손병희와 함께 만반의 준비에 나선 공로를 인정받아 민족대표 48인에 이름을 올렸다.
천도교는 조선의 정치·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독립·청년·사회운동 등을 벌인 ‘신간회’ 출범과 운영도 주도했다.
심 지도위원에 공개한 천도교 영암군 교구장은 박인호가 정만권에게 1911년 2월22일과 1918년 11월25일에 수여했다.
심 의원은 “정만권은 박인호의 수행원으로 동학혁명과 3·1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선생으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했다.
상제교 신도증은 충남 청양군에 거주한 안성덕이 1927년 대법사(교주) 김연국(1857~1944)에게 받은 것이다. 상제교는 1917년 최시형의 수제자였던 구암 김연국이 천도교에서 나와 1925년 계룡산에서 창시한 동학 계열의 민족종교다.
김연국, 손병희, 송암 손천민(?~1990)은 ‘동학 3암’으로서 2세 교주 최시형의 수제자였다.
1925년 창간·1928년 3월 발행된 천도교회월보는 천도교 기관지로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깃들어 있어 조선청년들의 우상이 됐다.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일제의 강제 병합을 성토하는 성명서를 비밀리에 보내는 등 민족혼을 진작했다.
심정섭 지도위원은 “동학혁명과 3·1운동을 주도한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상제교 자료 5점은 민족의 자긍심이다”면서 “암울한 일제시대에 민족의 등불이었다”고 평가했다.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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