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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담 황순칠 작 ‘복덕’ |
문학으로 치면 등단의 의미일텐데, 한 사람은 1969년에, 또 다른 한 사람은 1978년에 등단을 한 셈이다. 주인공은 전남 순천 출생인 공전 손호근씨와 여수 출생인 고담 황순칠씨.
이들은 갑작스럽게 서예작품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일흔에 도달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연마를 해온 장본인들이다. 공전은 1969년부터 전남도미술대전에서 9회 연속 입선을 한데 이어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전남도미술대전 대상,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대상 등을 잇따라 수상하며 서예계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고담은 오히려 회화작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그의 화실에서 서예를 연마하고 있는 모습이 종종 목격된다. 고담은 공전보다 10년 늦게 서예 대회에 나가 입상한다. 1978년 전남도미술대전 서예부에서 첫 입선을 하게 된다. 2인전을 언급하면서 공전에 대해 고수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에 신뢰를 보냈다.
공전은 일찍부터 떡잎이 남다른 경우다. 광주 조대부고 1학년 때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 최고상(문교부장관상)을 비롯해 2학년 때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 최고상(한양대 총장상), 3학년 때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 최고상(대한교육연합회장상) 등을 수상하며 고등학교 3년 동안 서예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송곡 안규동, 근원 구철우, 강암 송성용, 소암 현중화 선생 등 당대 최고의 필력을 가진 서예가들을 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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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전 손호근 작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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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전 손호근 작 ‘칠월’ |
이어 고담은 여수상고 재학 시절 서예를 접한 뒤 1978년 의재 허백련 선생의 연진미술원에서 추사 김정희의 필법을 연마했으며, 1979년부터 1980년까지 금봉 박행보 선생으로부터 도제 수업을 받기도 했다. 1981년 조선대 미술대학에 입학해 서양화로 전향했지만 서예를 놓지 않고 해·행·초·예·전서를 독학으로 공부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회화를 중심에 놓고 활동했지만 결코 서예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 졸업 후 화가로 활동을 펼치는 와중에도 서예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면에는 서예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화실에 나가면 마음을 가다듬고 서예를 먼저 연마했다고 한다. 왕희지를 비롯해 안진경, 구양순 등 중국 대가들의 법첩 임서(法帖 臨書)로 서예의 예술적 진수를 느껴보며 연마하는데 몰입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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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담 황순칠과 공전 손호근(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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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담 황순칠 작 ‘가화성’ |
김준태 시인은 고담의 서예에 대해 “왕희지 손과정 안진경 악비 소동파로 이어지는 중국 서예가들의 숨결과 기법, 사상의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북송시대 시인으로 불멸의 시 ‘적벽부’로 널리 알려진 소식 소동파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면서 “꼭 어느 한 서체를 고집하지 않고 해서와 행서, 초서로 그의 순결무구한 백지 위에서처럼 억압이 아닌 사유를 누리고 있다”고 평했다.
전시에 앞서 만난 공전은 2019년 국윤미술관에서 기획초대전 이후 6년만에 광주에서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고 했으며, 고담은 2024년(용띠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고담 서예전 음악회’를 통해 작품들을 일부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서예전에 대해 공전은 “제 작품은 동양예술이다. 서예 하나를 하기 위해 할 공부가 많다. 서예만 공부하기 벅차다. 자기 것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다”고 밝혔으며, 고담은 “지난해와 올해 작업한 근작들을 출품할 것이다. 이태백 두보 소동파의 글과 옛 선현들의 좋은 문구, 부처님이나 예수님 말씀 등을 차용했다. 예술가들은 자유로워서 초서가 가장 좋다”고 언급했다.
전시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무등갤러리에서 열린다. 공전은 서예와 그림을 절반씩 비율로 13점을, 고담은 그림 1∼2점을 포함해 20점을 각각 출품, 선보인다.
개막식은 11월 1일 오후 3시.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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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9 (수) 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