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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태영 사회부 차장대우 |
그렇다면 회재 박광옥은 어떨까.
회재 박광옥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지난 25일 열린 박광옥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나온 학계의 평가는 조금 달랐다. 박광옥을 16세기 호남 사림을 대표하고 개혁 정치에 참여한 관료로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박광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광주 지역에서 학문과 향촌 활동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다졌다. 154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곧바로 중앙 관직에 나아가기보다 지역사회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향촌 질서를 세웠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사람’이었다. 고경명·김언거 등 호남의 사림들과 시문을 주고받고 정자와 향교, 서당 등을 중심으로 교류했다. 친족, 향촌 활동을 통해 쌓은 인적 네트워크는 훗날 그가 중앙 관료사회로 진출하고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 활동을 지원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남구 주월동과 나주시 남평읍 광이리를 연결하는 도로인 ‘회재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과 거병을 도모했던 회재 박광옥의 호에서 따왔다.
그동안 박광옥에 대한 기억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도운 인물’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었다면, 이제는 시선을 조금 넓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의병 활동은 그의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한 축이지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박광옥을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은 의병장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리와 학문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와 중앙 정계를 잇고 개혁 정치에 참여했던 호남 사림의 한 인물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탄신 500주년을 맞은 올해 박광옥에 대한 평가도 이제 그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송태영 기자 sty1235@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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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7 (목) 1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