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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안 칼럼니스트 |
이처럼 원문을 직역하기보다 의미나 의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번역을 ‘초월번역’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데드풀같은 영화처럼 미디어나 해외 연예인들이 내방했을 때 통역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외교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초월번역(?)을 보게 될 줄이야.
바로 일본의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관련한 보도자료에서다. 일본은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했으나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서 추가 정보를 요구하는 보류 권고를 받았다. 그동안 한국 정부에서 요구해왔던 일제강점기 사도광산의 강제노역 역사에 대한 누락 부분을 개선하라는 해석이 나오는 부분이다.
한국은 권고가 아니라 아예 등재 불가 처분이 떨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일본을 돕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지난달 27일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제46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일본의 사도광산이 결국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21개국 전원의 동의를 얻었고 이 중 한국도 포함돼 있다. 일본이 사도광산 관련 전시물을 설치할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동원 과정의 억압성을 보여주는 ‘강제’라는 표현을 요청했지만 아주 깔끔하게 묵살당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찬성표를 던졌고 수탈 대상이었던 한국의 지지가 일본에게 힘을 실어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더 기함할 일은 외교부가 이를 무슨 커다란 성과처럼 보도자료를 배포했다는 점이다. 자료에는 일본 수석 대표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도광산에서 일한 ‘한국인 노동자’를 위한 전시물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등재 찬성을 설득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였다. 외교부는 긴 발언물을 줄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변명에 불과하다. 애당초 일본 수석 대표의 발언문 전문을 축약한 것도 아니고 일부분을 발췌했을 뿐이다. 단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뉘앙스까지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외교부가 상대국의 발언 일부를 자의적으로 변형해 보도자료에 인용했다는 것부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외교부는 데드풀 번역가처럼 초월번역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이걸 초월번역이라고 표현하면 기존 번역가나 통역사들을 모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도광산 문제 뿐만 아니라 무능한 외교를 볼 때마다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러다 정말로 한국을 일본에 넘겨주기라도 할 심산인가? 전쟁은 더 이상 무력으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문화와 정신으로도 얼마든지 나라를 뺏길 수 있다. 무조건 일본을 적대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과 한국인을 무조건 증오하는 일본의 극우와 다를 게 뭔가. 단지 아닌 건 아니다 라고 강경하게 표현하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간혹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외교를 민간외교사절단체라고 자부하는 ‘반크’가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지난해에는 반크의 한 개인 회원이 BBC가 동해를 일본해로만 표기해 오던 것을 발견했고 여러 근거자료를 들어 지도 수정을 요청했다. 일본해가 완전히 삭제된 건 아니지만 동해가 동시 표기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외에도 반크가 하는 일들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렇듯 국민이 운영하는 단체도 해내는 일들을 한국 정부는 왜 못하는 걸까? 외교부니까 더 크고 방대한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지만 모든 일은 밀알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초가 단단하지 못하면 아무리 크고 높은 건물을 올려봤자 어느 순간이 되면 쉽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이 겪은 고난과 역경은 묻혀서는 안 될 역사다. 과거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걸 왜 모를까? 제발 지금이라도 헛짓은 그만하고 제대로 된 외교를 펼쳐주기를 정부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