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권익위원 칼럼]주머니 속의 작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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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권익위원 칼럼]주머니 속의 작은 종교

조상열 대동문화재단 대표이사

‘화폐’를 ‘돈’이라고 한다. 돈은 말 그대로 돌고 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돈의 단위를 ‘환’이라고 했고, 지금은 ‘원’이라고 하는데 모두 순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돈은 한 곳에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돌고 돌면서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 잠시 머무르다가 떠나가기를 반복한다. 사람들 사이를 돌면서 서로의 관계를 다양하게 만들어가기도 하고,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대단한 위력을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돈을 만들어 사용하면서부터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돈의 위세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 자체가 권력이자 힘이다.

그렇다면 돈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화폐는 가치를 갖는 교환 기능뿐만 아니라, 화폐에 숭배하는 신과 사람, 자연물을 그려 넣어 홍보 또는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적 수단으로 사용했다. 고대부터 조개껍질이 돈의 역할을 해오다가 진시황이 직접 도안하고 주조한 ‘반량전’이란 화폐가 시작됐다. 겉은 둥근 모양으로 하늘을 상징했고, 가운데는 사각형 모양으로 땅을 상징하는 반량전은 우주 만물의 이치를 담았는데, 이는 동아시아 화폐의 최초 모델로 근대 이전까지 동양 화폐의 기본형이 됐다. 이후 고려말에 종이돈이 등장하지만 조선 태조 대에 귀한 종이를 사용한다는 비판으로 폐지됐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대원군 때 당백전이라는 돈을 발행했다. 흔히 우리가 빈털터리 신세일 때 땡전 한 푼 없다고 하는데, 땡전은 ‘당백전’을, ‘푼’은 엽전 한 닢을 뜻한다.

사람이 소망하는 다섯 가지 복이 있다. 이른바 장수(長壽), 부귀(富貴),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인데 이 중에서 부(돈)를 두 번째로 여긴다. 오복 중 하나인 돈일지라도 때로는 몸을 병들게 하거나 앞날을 망치는 독이 될 수 있다.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진다는 ‘재다신약(財多身弱)’. 재물로 인해서 송사(訟事)나 불행한 일들이 잇따르는 등 심신이 편할 날이 없어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은 갑자기 일확천금의 큰돈이 생겼을 때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병이 나거나, 잘못 쓰다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다.

돈이 많으면 학문이 무너진다. 이를 ‘탐재괴인(貪財壞印)’이라 한다. 종교인, 수도자, 학자들에게 돈이 많으면 본연의 길을 잃고 방종하게 되곤 한다. 돈을 잘 쓰면 품격과 덕업이 쌓이지만, 돈을 잘못 쓰면 격이 떨어지고 재앙이 미친다. 그런 탓에 돈은 ‘필요악’이다. 옛 어른들은 기생들이나 가마꾼에게 돈을 줄 때도 자리 밑에 살짝이 밀어 넣어주거나, 종이에 싸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주었다.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도 대상에 대한 배려를 담았다.

돈은 어떻게 해야 불어나는 것일까? 돈을 쌓아두고 쓰지 않으면 스스로는 만족할지 몰라도 아무런 위력이 없다. 거래가 이뤄지고, 잘 쓸 때만이 돈의 가치가 발휘된다는 말이다. 작은 부자는 돈을 아껴서 부자가 되지만, 큰 부자는 돈을 잘 써서 부자가 된다고 했다. 돈을 잘 쓰면 거기에 사람도 붙고, 인심도 얻어지니 하는 일마다 잘 이뤄진다. 바로 큰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조용헌의 ‘인생독법’에 나오는, 돈을 쓰는 방법들이 흥미롭다. 적선(積善), 떡밥, 뇌물, 기마이. 적선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좋은데 쓰는 돈으로,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다. 경주 최부잣집과 구례 운조루가 보인 나눔이 대표적인 적선인 셈이다. 불가에도 ‘무상보시’란 말이 있다. 적선과 무상보시는 후손에게 무의식적으로 옮겨가 발복(發福)한다고 여겼다. 반면 땀 흘려 번 돈이 아니면 절대 오래 지키지를 못한다. 옳지 않은 방법이나 뜻밖에 얻은 횡재(橫材)는 횡재(橫災)수라는 재앙을 불러온다.

‘떡밥’도 돈 쓰는 방법이다. 사람은 관계가 중요하다. 만남은 인연이지만 좋은 관계는 노력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관계 맺기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평소에 술과 밥, 선물과 용돈 등 다양한 떡밥을 풀어서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것은 훗날을 위한 적금이다. ‘뇌물’도 돈을 쓰는 방법이지만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 뇌물이다. 반드시 양자의 신뢰와 배짱이 있어야 주고받음이 수월한 법이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쓰고,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했다. 가끔 돈을 시원스럽게 쾌척(快擲),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 좋게 한 턱 쏘는 사람을 ‘기마이’라 하는데, ‘기마에(氣前)’라는 일본말에서 유래한다.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다. 지갑을 잘 여는 사람의 옆에는 사람이 모여들고, 입을 많이 여는 사람의 곁에는 함께하는 친구가 없어서 늘 외롭다.

유대인들은 돈을 ‘주머니 속의 작은 종교’라면서 굳게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큼 주머니 속의 돈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이방인으로 수천 년 동안 떠돌이로 살면서 돈이 있어야 산다는 철학을 터득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탓에 길거리에서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환전상(換錢商)을 주로 하며 살았다. 그런 노하우로 세계 금융업계를 장악하고 최고수가 될 수 있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큰손으로 뒷배에서 정치,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이같이 주머니 속 종교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돈이라 할지라도 만사에 전지전능할 수는 없다. 때문에 베이컨은 “돈은 비료와 같다. 뿌리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했다.

평생토록 돈을 벌기만 하고 쓰지도 못하는 수전노(守錢奴)를 부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적은 돈이라도 넉넉하게 이웃 사회와 더불어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진짜 부자라고 일컫는다.

대동문화재단은 시민들의 후원금을 모아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이들을 격려하는 뜻깊은 시상을 하고 있다. ‘대동전통문화대상’으로 올해 여섯 번째다. 요즘 같은 경제불황 속에도 뜻있는 시민들과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십시일반 후원금을 희사해주고 있다. 한 분 한 분 너무도 소중하다. “사람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돈을 낙엽처럼 태울 줄 알아야 한다.” 전통 문화계의 큰 뿌리 한창기 선생의 말씀이다. 메세나 활동으로 문화 나눔을 실천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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