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권익위원 칼럼]그날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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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권익위원 칼럼]그날들의 기억

이지안 잇다커뮤니케이션즈 대표

필자는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는 작품을 잘 읽지 못한다. ‘냉정과 열정사이:Rosso’를 읽었을 때도 여자 주인공의 우울함에 젖어 들어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이런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들은 피하는 편이다.

사람들의 기류에도 잘 따르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1000만 영화, 시청률 대박이라며 사람들이 열광하면 할수록 나는 더더욱 그런 작품들에서 등을 돌리곤 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볼 여력이 될 때 보고 싶어하는 주의라고 할까.

그런 내가 요즘 가장 뜨거운 감자인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일의 연장선으로 읽게 된 거라 첫 장을 펼치기까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총 6장과 작가의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215페이지의 종이에 찍힌 활자들이,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의 상황과 생각과 마음과 고통이 너무 절절해서 목구멍에 굵은 돌덩이가 걸린 것 같았고 가슴 위에 커다란 산이 내려앉아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그날에서 살아남은 은숙의 고통스러운 절규에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부상자회 청년들이 잡혀들어오다가 경찰서에 이미 잡혀와 있던 유족회 어머니들을 보며 울부짖는 장면에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소년이 온다’를 완독한 그날 밤부터 며칠간 여지없이 가위에 눌리고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이 책을 읽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5·18이 일어났던 그때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저 집의 모든 불을 끈 채 방문과 창문을 두꺼운 이불로 가리고 숨죽이던 부모님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또렷이 기억난다. 무슨 일인지, 왜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고 성인이 돼서 5·18에 대해 알았을 때도 막연히 ‘그랬겠구나’ 정도가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목숨을 바쳐 민주화를 외치던 이들이 겪었을 순간과 감정들을 한순간에 공감하게 됐다.

‘소년이 온다’를 접하기 전에 역사적 사건을 다룬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바로 광주시립창극단에서 정기 공연으로 올린 ‘여울물소리’다. 황석영 작가의 작품이 원작인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우리 역사의 격변기에 평범한 민초였던 이들이 어떻게 역사적 현장에 뛰어들게 되는지 그 여정과 아픔을 보여준다. 이 거대한 작품을 3시간 여의 공연에 어떻게 압축할까, 원작과 어떤 부분이 다르고, 어떤 부분이 같을까, 같은 호기심을 품고 공연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원작과 비교하는 걸 멈추고 극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무대 연출이 어떠니, 각색이 어떠니 같은 것도 떠올릴 새가 없었다. 그저 이런 작품을 단 이틀만 공연한 후 내린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조금 더 다듬어 장기 공연으로 올리고 다른 지역이나 해외까지 뻗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 작가로 인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더 관심이 높아진 지금, K컬처에서 제외돼 있던 문학이나 공연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저 하루하루 자신의 자리를 살아가는 것으로 인생을 끝낼 수도 있는 사람들이 불의에 격분하고 심장이 타올라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쓴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 모여 커다란 무리를 이루고 대의를 쫓아 앞만 보고 전진한다. 사람들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숲을 볼 줄 알아야 시야가 넓고 창의적이고 주도적으로 일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무가 없으면 숲을 이룰 수 있을까? 작건 크건, 튼튼하건 부실하건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들이 모여야 큰 숲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 남겨진 역사라는 큰 숲만 볼 게 아니라 그 역사 속에 뛰어들었던 한사람 한사람의 나무를 보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 용기를 가졌던 건지, 그들의 희생으로 무엇을 이루었는지. 목숨을 건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남겨진 자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걸 기억해야 할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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