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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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세평]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김만선 아시아문화중심도시지원포럼 위원

그 해 겨울은 매서웠다. 하늘과 맞닿은 건물 지붕 언저리에 머물던 고추바람이 주저앉으며 살품을 파고들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 일어서고 으스스 소름마저 돋았다.

놀라운 것은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이 되레 조금씩 는다는 점이었다. 두툼한 옷에 털모자와 장갑, 목도리를 한 사람들이 입김을 내뿜으며 한 명, 한 명 다가왔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단발머리의 소녀, 아빠 품에 깊숙이 안긴 아이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휴대용 핫팩, 주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는 따뜻한 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촛불 때문만도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 선 마음과 마음의 열기가 더해져 서로를 덥히고 영하 3도의 추위마저 녹이고 있는 것이었다.

행사가 시작되면서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반촛불 세력에 대한 반론, 소녀상 위안부 합의 등 굴욕외교에 대한 비판 등을 내용으로 한 주제발언 등이 촛불의 환호 속에 이어졌다. 세월호 추모영상을 보는 동안 어떤 이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아~, 짧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오후 7시에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의미로 1분간 소등행사가 진행됐다.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약속처럼 주변 정리에 나섰다.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치우고 쓰레기를 주웠으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다. 촛불집회의 첫 출발은 지난해 10월 29일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측근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고, 촛불을 든 채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국민들은 박 대통령의 탄핵과 국정 농단세력 구속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광주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5·18민주광장 등지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광주시국촛불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의 외침은 눈과 비바람 속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칼바람이 부는 한파가 몰아치고, 눈과 비가 내려도 어김없이 촛불을 밝혔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마음은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집회 때마다 팔을 걷어붙이고 자원봉사를 하는 초등학생,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촛불의 힘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인용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잃게 됐고, 고위 공무원, 기업인 등과 함께 구속됐다.

하지만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촛불은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고 ‘적폐청산’을 추진해나가고 있지만 ‘참된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야 한다’는 촛불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더욱 뜨겁게 타올라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을 넘어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진행된 4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등 각종 비리의혹과 국정원 정치공작 등 지난 정부에서 벌어진 국정 문란을 파헤쳐야 한다.

촛불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잡은 어둠을 찾아 환하게 비춰야 한다.

‘갑질 횡포’는 일부 대기업과 군 장교 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공무원이나 회사의 조직 내에서도, 원청과 하청의 관계 속에서도, 또 그 밖에 힘의 균형추가 중심에 놓여 있지 않은 모든 ‘관계’ 속에 존재할 수 있다.

촛불은, 지나친 지시나 요구를 함으로써 을의 자존감에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히는 모든 갑의 횡포에 맞서 타올라야 한다.

블랙리스트나 화이트리스트 역시 지난 정부가 연예인이나 문화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것만이 모두가 아니다. 문서화 했느냐의 여부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정당한 노동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회사, 경쟁하는 동료나 단체 간에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촛불은, 객관적 잣대 없이 ‘애사심’이나 ‘주인 의식’으로 포장한 채 구성원을 편가르는 조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이들의 민낯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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