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생 50년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누며 살아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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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생 50년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누며 살아갈 것"

[남도예술인]베이스 임해철 호남신학대 명예교수
성악콩쿠르·시립오페라단 창단 지역 오페라 발전 ‘견인’
광주오페라단 단장·정율성음악제 위원장 등 행정가 활약
심장 이식 새 인생 얻어…복지시설 등 찾아가 희망 나눔

임해철 명예교수는 “지난 음악인생을 돌아보면 감사의 연속이었다”면서 “음악적으로 수십 년간 배운 것들을 나누며 봉사하는데 집중해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삶은 참 파란만장했다. 어린 나이에 오페라 주연으로 데뷔해 내로라하는 국내외 무대에 서며 성악가로 빛나는 시절을 보냈고, 30여년간 문화 현장에서 뛰며 불모지였던 광주의 오페라 문화 발전을 견인했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심장을 이식받고 새 삶을 얻은 지금까지 그의 곁에는 늘 음악이 함께했다. 음악인생 50년을 맞이한 성악가 임해철 호남신학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다.

내년이면 칠순을 맞는 그는 성악 공부를 시작한지 50년이 된 올해를 기리기 위해 34년간 근무한 호남신학대 제자들과 함께 지난 6월 유·스퀘어 문화관 금호아트홀에서 기념 공연을 선보였다. 소프라노 김혜미·박빛나·서하은·이유림, 테너 조창후, 바리톤 조재경, 피아노 김민정·나원진·박지현·조혜원, 첼로 전시내 등 실력 있는 음악인들이 한 무대에 올랐다.

무대는 한국가곡, 외국가곡, 독일가곡, 오페라곡 등 총 4개로 구성, 윤학준의 ‘나 하나 꽃피어’, 이홍렬의 ‘꽃 구름 속에’ 등 한국가곡을 비롯해 포레의 ‘사랑의 노래’, 토스티의 ‘세레나데’,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 중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어’ 등 친숙한 곡들을 들려줬다. 각 무대마다 임 교수의 지난 50년 활동기를 모아 만든 영상을 상영해 의미를 더했다.

임 명예교수가 2002년 국립오페라단 공연 ‘음악이 먼저 말은 그 다음에’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다.
명문고로 손꼽히는 광주제일고 출신인 임 교수는 과거 아버지의 아들로 유명했다. 그의 아버지인 고 임선호 전남대 의대 교수는 생전에 모교인 제일고의 발전을 위해 고액의 기부를 했을 뿐 아니라 사회 기업가로서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임 교수는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대에 진학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자가 음악을 한다는 건 비정상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사회에 기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70년도에 광주일고에 기부하신 게 억대가 넘었고, 돌아가셨을 때는 광주일고 야구부가 와서 운구를 도왔을 정도죠.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저는 음악적 재능을 펼치고 싶었습니다. 남자가 음악을 한다니 아버지의 반대가 정말 심했죠.”

주변에 음악 선생님들은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변성기가 끝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는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 9월 연세대학교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성악대회에 나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2등을 차지했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성악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콩쿠르 수상자로 연세대 음악학과에 주목을 받으며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대학교 1학년 때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주연으로 데뷔 무대를 가졌고,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국내 성악계의 큰 어른인 성악가 김자경 선생의 김자경오페라단에 들어가 함께 무대에 섰다. 서울오페라단 창단 공연, 세종문화예술회관 개관 오페라 무대 등 국내 굵직한 행사들에 출연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국내 최고의 신인등용문인 ‘동아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쥐며 그야말로 최고 기대주로 떠올랐다.

“저는 남들에 비해 속도가 빨랐습니다. 다른 이들은 유학갔다 와서나 설 수 있는 공연에 일찍 서게 됐죠. 지금 생각해보면 좋았던 점도, 안 좋았던 점도 있어요. 속도가 빨랐던 게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으니까요.”졸업 후 이태리로 유학을 떠난 그는 로마 Santa Cecilia 국립음악원에 1등으로 입학했다. 3년의 공부를 마친 후 1985년 한국인 최초로 로마 오페라 ‘라보엠’ 무대에 주연으로 데뷔하는 영광을 얻었다. 종합예술지 ‘객석’의 창간호에 한국 음악계를 짊어질 성악계 젊은 인재로 뽑혀 소개되기도 했다.

귀국 후 연주자로서 무대에 주력할 거란 기대와 달리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깊이 빠져있었던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 신학대에 입학했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때였다.열심히 새로운 학문 탐구에 빠져지낼 무렵, 광주 호남신학대로부터 새로 설립하는 음악학과의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당시 호남신학대학교는 4년제 전환을 위해 막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는 1988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호남신학대 교수로 부임했다.내려와서 본 광주는 많은 부분에서 불모지였다. 임 교수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광주 학생들의 재능이 서울 학생들과 비교해 전혀 떨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다만 서울에 비해 인프라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부족했다.

임 명예교수가 2009년 광주오페라단 단장시절 선보인 음악극 ‘김치’의 커튼콜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임 명예교수가 지난 6월 20일 광주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24주년 기념 평화음악회’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
“연세대와 호신대 학생들 소리를 비교하니 큰 차이가 없었어요. 안타까운 건 학생들을 깨어나게 할 자극제나 인프라가 없다는 거였죠. 가능성이 보이는데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게 답답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1992년 광주오페라단 단장직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음악 행정가로서의 삶에 더 치중하게 됐다. 1996년 ‘광주성악콩쿠르’를 태동시켜 저명한 외국 교수들을 초청해 마스터클래스를 여는 등 지역 예술계의 부족한 인프라를 개선하고 학생들이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정율성 국제음악제’ 집행위원장,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 광주문화재단 이사 등을 맡아 중앙과 지역 주요 기관을 오가며 광주 성악계 부흥과 활성화를 위해 힘썼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인생에 가장 큰 좌절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심장 근육 이상으로 기능이 저하되는 확장성 심근병증을 판정받고 심정지로 쓰러졌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은 물론 생명까지 위독해져 상황은 심각했다.

“제 심장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술을 하지 않고 최대한 버티다가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수술을 결심했습니다.”

13시간의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기적처럼 새 삶을 얻게 된 그는 이전에는 보지 못한 주변을 살피며 남은 생을 더욱 값지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병원, 사회복지시설, 교도소 등에 찾아가 재능을 나누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건강을 위해 예전처럼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겐 광주시립오페라단 창단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었다.

“당시 지역 민간오페라단의 활동에 한계가 온 분위기였어요. 다른 지역 단체들은 빠른 속도로 커가고 있었고, 우리 지역에도 시립단체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됐죠. 재정이 확보돼 장기 기획이 가능한 단체는 시립만이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창단추진위원회장을 맡아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3년 간 헌신한 끝에 2017년 9월 마침내 지역 오페라의 숙원인 광주시립오페라단 창단을 이뤄냈다.

2007년 ‘정율성국제음악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
임 교수는 지난 삶을 돌아볼 때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았을까’ 스스로에게 되묻곤 한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집에서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서울의 화려한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며 성악가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무대에서 내려와 지역 예술 현장에서 발로 뛰는 삶을 선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광주 예술의 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향인 광주에 내려와 보니 학생들은 물론 관객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지역 공연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지역 오페라가 부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죠. 좋은 관객과, 공연물, 공연장 삼박자가 갖춰진다면 광주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겁니다. 행정가들이 인프라를 갖추는데 좀 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약 5년 전부터는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의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인 ‘생생스쿨’의 전문강사로서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생명윤리와 나눔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또 기증자 가족들과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는 생명의소리합창단의 활동을 도우며 국내외 장기기증 인식 개선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고 있다. 그는 남은 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재능을 나누며 살아가는 데 쓰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 음악인생을 돌아보면 감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음악적으로 제가 수십 년간 배운 것들을 나누며 봉사하는데 집중해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김다경 기자 alsqlsdl94@gwangnam.co.kr         김다경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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