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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씨가 13일 친일 유림단체 대성문학원 자료 2점을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
특히 민족정신과 충효사상을 앞세워 국권 회복에 앞장서기는커녕 선비정신을 입게 담기 부끄러울 정도로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13일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씨(82·광주 북구)가 친일 유림단체 대성문학원 자료 2점을 공개했다.
대성문학원은 유교의 경전을 연구하고 유교의 진리를 천명하며 ‘충효열사상’의 선양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러나 이러한 취지와 달리 구성원 대다수는 대동학회(1907년), 공자교회(1909), 유도진흥회(1920), 조선유교회(1932), 조선유도연합회(1939)에 가입해 활동한 친일유림들이다.
실제로 원장 민병한은 대한제국 판서(장관)을 역임하고 1907년에 조직된 친일단체 대동학회와 공자교회 발기인이었다.
부원장 이범석은 승지(비서실장)를 지내고 1910년 3월에 일진회의 합병청원서에 동조해 결성된 국민협성동진회의 간부다.
고문이었던 이재헌은 동학괴수섬멸 상소를 올린 뒤 판서를 역임했다. 송영대는 참판(차관)을 역임한뒤 대동학회, 조선유교회 간부로 참여했다. 이명상은 참판을 지내고, 조선유도연합회의 간부를 맡았다.
대성문학원 핵심 요직은 강사(교수)인데 대표적으로 윤영구, 한익교, 송창섭, 정인욱이다. 윤영구는(1869~?)는 참판과 관찰사(도지사)를 역임한 학자이자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조선사 편찬을 통해 일제의 식민사관을 적극 협조한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다.
심 명예관장이 공개한 표창장(가로 22.5㎝, 세로 31.5㎝)은 1929년 경성부(서울) 방산정 1번지에 위치했던 대성문학원이 전남 해남군 송지면에 거주한 용영환에게 발송한 것이다.
이는 강사 정인욱이 효자 용영완에게 ‘시호’(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 그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를 지어준 것이다. 해당 문서에는 ‘전남향교회와 유림들의 청을 받아 전라남도 용역단에 전달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효자 등 상과 시호는 나라에서 정해서 내려주는 게 일반적이지만 대성문학원는 자신들의 이름으로 상을 내리고 시호까지 줬다.
특히 이들은 국가를 대신해 충효사상을 전달한다는 명분으로 일제로부터 매년 한 차례씩 은사금(100원) 등을 받았다. 효자 표창문 1개당 쌀 5가마니를 챙겼으며, 해당 수익금은 일제와 7대 3 비율로 배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효자 표창문을 남발한 것은 많은 효자를 발굴할 경우 일제가 별도로 포상하는 상장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이를 통해 금융, 토지 등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했다. 각종 세금과 군포, 부역 등에서 면제받았고, 일부는 이를 명분으로 신분 상승을 꾀했다.
표창문 수여자 역시 일제로부터 병역, 진학 등 각종 혜택을 받았다.
대성문학원과 쌍벽을 이룬 친일유림단체 ‘모성공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장 김종한, 찬성장 박기양, 고문 민병석 등 모두 대한제국의 판서 출신이자 일제로부터 남작, 자작을 받은 친일 거물들이었다.
특히 민병석의 아들은 대한민국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인데 부자가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재됐다.
심정섭 명예관장은 “친일 유림들이 조직한 대성문학원은 충효사상을 천명하면서 친일 행각에 앞장섰다”면서 “효자 표창문을 지어 금품을 갈취하니 지하에서 공자가 통곡했을 것”이라고 꾸짖었다.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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